부처님의 가르침은 위대한 언어에 비유될 수 있다. 그것은 엄청난 어휘력과 무한한 표현 잠재력을 가진 우리 인류의 보물 덩어리이다. 그러나 불교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운 반지나 목걸이로서가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형태로만 받아 들여 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많다. 말하자면 그 동안 불교는 문법(이론)의 형태로만 논의되어 왔을 뿐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언어 능력, 즉 회화 구사력(응용)으로 인식된 적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불교는 다소 고답적이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웃 종교들은 이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돋보인다. 이와 같은 지적은 지금까지의 연구동향이나 접근방법을 반성해 보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제 불교를 불교 내의 관점에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좀더 다양한 주제들과 연관시켜 보려는 용기와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것은 말 그대로 시대적 요구이다. 일부 서양의 불교윤리학자들은 이미 이런 노력을 시도하고 있고, 나름대로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온이나 칼루하파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서양윤리학적 방법을 통해 불교윤리를 재해석하고 나아가 응용윤리학적 가능성까지 타진하고 있다. 우리도 앞으로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해야 된다고 본다. 그럴 때 비로소 불교윤리는 특수윤리의 차원을 넘어 우리 모두의 보편윤리로 거듭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필자는 평소 불교윤리를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단순소박하게 형식화해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리주의는 이론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여러 가지 도덕적 갈등 상황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행위에 앞서 그 행위의 결과가“좋은 것은 가능하면 많이, 그리고 나쁜 것은 가능하면 적게”생기도록 행위 하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불자들은 "선업은 많이 지으면 지을수록, 악업은 적게 지으면 지을수록"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를 하게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선업에는 선과가 악업에는 악과"가 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승보살의 자리이타행 또한 공리주의에서 하는 "유용성(utility)"개념과 대체로 일치한다. 우리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타자리행"이라고 하지 않고 "자리이타행"이라고 했다. 공리주의가 개인의 이기심을 전제하는 "나를 포함한, 가능하면 관련된 당사자들 모두의 행복(이익)"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물론 불교는 계율의 준수나 내적 동기도 아울러 강조한다는 점에서 순수공리주의의 차원을 훨씬 넘어 서는 종합윤리학이라는 비판이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도덕적 품성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본 것으로 불교윤리와 공리주의를 직접 비교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불교윤리를 좀더 현대적이고 실천하기 쉬운 일상의 도덕 언어로 구사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밀의 공리주의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인식을 견지하면서 "불교윤리는 특정 종교만의 윤리가 아니라 서양윤리학적으로도 얼마든지 설명 가능한 보편적 윤리체계"라는 것을 입증해 보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Ⅰ. Introduction of 'Moral Character' to Utilitarianism
Ⅱ. Utility of Agent's Character
Ⅲ. Utilitarian Development of Individual Character
Ⅳ. Utilitarian Role of Virtue
Ⅴ. Conclusion: Redefinition of Utilita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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