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해석학의 창시자인 슐라이어마허 이후로 해석학은 “이해의 예술(기술)” 혹은 “해석의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해석한다는 것인가? 텍스트이다. 다시 말해서, 해석학의 대상은 곧 텍스트이다. 하지만 텍스트를 대하는 두 가지 다른 입장이 있다. 소위 낭만주의 해석학이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은 텍스트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자만큼이나 그리고 저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했던 것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낭만주의 해석학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이에 반해서, 현상학적 혹은 존재론적 해석학으로 불리는 가다머와 리쾨르의 해석학은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의 의도, 즉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그 사명을 두고 있다. 이 텍스트 자체가 말하는 것을 가다머는 “텍스트의 것”, 리쾨르는 “텍스트의 세계‘라는 부른다. 이처럼 해석학의 두 전통 사이에 인식론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낭만주의 해석학이 “글쓰기에 의한 고정”이 가져오는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글쓰기로 고정된 모든 담화”라고 정의하는 리쾨르와 가다머에 따르면, “글쓰기에 의한 고정”이 가져오는 직접적인 결과는 텍스트가 저자로부터 그리고 텍스트가 생산된 모든 상황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글쓰기에 의한 고정으로 인해 텍스트는 “자기소외” 혹은 “거리두기”라는 존재론적인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텍스트의 자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텍스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텍스트의 자립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의 의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나아가, ‘왜 텍스트를 이해하는가?’라는 질문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가다머와 리쾨르에 따르면,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텍스트의 것’ 혹은 ‘텍스트의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s`approprier` 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는 텍스트의 것을 자신의 상황에 적용시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텍스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 가다머와 리쾨르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두 철학자는 아무런 매개 없이 직접적인 지각과 직관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자기를 파악한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결코 직접적인 자기이해는 불가능하고, 오로지 타자 혹은 텍스트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텍스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텍스트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다머와 리쾨르의 해석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자기 이해에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해석학의 대상인 텍스트는 언어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해석학의 근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로고스, 즉 언어를 가진 동물이다. 문제는 인간이 언어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언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는 데 있다. 언어 자체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언어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언어로 다 옮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또한, 언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다의성과 중의성이라는 고유한 속성으로 인해, 한 마디 말이나 하나의 텍스트가 단 한 가지의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모든 말에는 ‘말해지지 않는것lenon-dit`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언어 자체에 고유한 속성과 언어 현상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하나의 텍스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는 무한의 작업이고, 결코 해석이 작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해석학적 문제는 언어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바로 언어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다머는 “이해한다는 것은 늘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자신의 경구로 삼았던 것이다.
Ⅰ. Le texte, objet herméneutique
Ⅱ. Deux attitudes devant le texte
Ⅲ. Texte, langage et comprende
Ⅳ. Une têche infinie
Ⅴ. Comprendre autrement
Bibliographie
논문요약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