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은 아름다움에 대한 학문만이 아니다. 미학은 본디 감성학이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무엇이라도 미학의 범주에 속한다. 훌륭한 예술작품 가운데에는 아름답기보다는 거룩한 것이 더 많으며, 그것을 이른바 ‘숭고’(崇高: Sublime)이라고 부른다. 어떤 서예작품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추하기도 한데, 그것은 아름다움과는다른 서예미학의 심미범주 안에서 정당화된다. 그것은 ‘힘’과 관련된 것으로 ‘기’(氣)로 불려지기도 한다. 기는 천리를 싣고 유행한다. 추사체도 그러한 유행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중국의 18세기말의 유행을 김정희는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종이보다는 돌에 새긴 글이 좋다’는 주장을 완원(阮元)이 이론화했고 당시 많은 서예가들이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한국미학사에서는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탑으로 옮겨가면서 슬픔의 미학이 기백의 미학으로 바뀐다. 그 중심에 고유섭이 있다. 조선의 선은 섬약미만 있는 것이아니라 생동성도 있었다. 우리 예술의 미개성은 오히려 비균제성(非均齊性:asymmetry)으로 옹호된다. 명랑함과 해학이 한국의 심미범주로 성립된다. 그것이바로 ‘슬픔에서 웃음에로’의 미학적 전환이었다.서체변혁운동은 중국예술사에서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문체가 바뀌면 사고가바뀌듯, 서체가 바뀌면 감성이 바뀐다. 문체가 철학을 대표한다면, 자체는 미학을대변한다.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書如其人)는 말은 그 사람의 의지와 신념을 표방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함을 뜻한다. 오늘날의 서예가들이소홀히 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기교만 있고 이념이 없다. 기술만 있고 사상이없다. 글자만 있고 글씨가 없다. 문자만 있고 문장이 없다. 마침내는 아름다움만있고 힘이 없어지고 만다.과연 한국서예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가? 우리는 고통과 그 극복에서 감동을받는다. 이렇듯 한국서예의 정체성은 우리의 과거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출발한다. 민중과 동떨어진 감성이 아니라 함께 호흡하는 시각언어일 때, 우리는 그것을 한국의 서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美學不但是有關美的學問. 美學本是感性學. 因此讓我們感動的任何東西也可以屬於美學範疇. 在傑出的藝術作品中, 有些是美不了, 而是神聖的, 此被定義爲崇高(Sublime). 有些書法作品奇怪又醜,而它在與美無關的書法美學的審美範疇中可被正當化. 這是相關於物理力量的所謂氣. 氣靠着天理而流行. 秋史體也誕生於那種流行過程當中. 金正喜積極吸收了中國的十八世紀末的流行. 阮元樹立了帖不如碑的理論, 當時不少書法家同意了他的主張.韓國美學史的關心從陶磁器遷移到石塔以後, 悲哀的美學變成了氣迫的美學. 高裕燮站在其中心處.朝鮮的線不僅僅露出纖弱美, 反而呈顯生動性. 我們藝術的未開性反而被維護爲非均齊性(asymmetry).然則明朗和諧謔被成立爲韓國的審美範疇. 它便是從悲哀到笑容的美學轉換.書體變革運動可說是在中國藝術史當中最大的變化. 遂着書體變化, 感性連着變化, 正如: 遂着文體變化, 思考連着變化. 文體代表哲學, 而字體代表美學. 書如其人此句含蓄某人的意志和信念, 也就是, 定立自己的價値觀而實踐之. 今日的書法家忽視的乃是這一點. 只有技巧而沒有意識; 只有技術而沒有思想; 只有字句而沒有文章; 總而只有美麗而沒有力氣.韓國書法是否眞的給人民感動? 我們由痛苦及其克服被感動. 就這樣, 韓國書法的同一性出發於針對我們過去的認識和走向未來的希望. 與人民一起呼吸的視覺言語才能構成爲韓國的書法.
1. 아름답지 않은 피에타
2. 추한 추사체
3. 종이보다 굳은 돌
4. 우리는 순수비가 있다
5. 도자기와 탑 그 이후
6. 감성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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