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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세종조 《율려신서》의 유입과 아악정비에 미친 영향

Introduction to 『Yulryosinseo』 in the King Sejong’s Period and Its Effect on Reorganization of Court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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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재위(1418~1450) 시절, 예악문화의 황금기를 열었다. 곧, 예(禮)는 ① 제사에 관한 길례(吉禮), ② 상사에 관한 흉례(凶禮), ③ 군사에 관한 군례(軍禮), ④ 인국의 외교에 관한 빈례(賓禮), ⑤ 왕실의 혼사와 국가 경사에 관한 가례(嘉禮) 등 오례의절(五禮儀節)에 따른 제도적 규범을 마련하였다. 악(樂)은 새 왕조의 무공(武功)과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각종 제사음악, 조회음악, 회례음악, 연향음악 등을 재정비하여 하늘과 땅이 더불어 조화하는 균천(鈞天)의 시대를 열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세종조 음악정비는 크게 초기ㆍ중기ㆍ후기로 나누어 살펴진다. 초기(1419~1428)와 중기(1429~1442)는 율관제정과 악기제작, 제사음악과 조회음악의 정비로, 아악의 기틀을 확립한 때라면, 후기(1443~1450)는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보태평, 정대업 동 향악곡 제작과 정간보 창안으로 이어지는 향악(鄕樂)을 새롭게 일신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종조 음악정비는 크게 아악과 향악 그리고 속악을 한 축으로 형성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데, 여기에서 아악정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율려신서(律呂新書)》를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송나라 채원정(蔡元定, 1135~1198)에 의해 저술된《율려신서》는 1430년(세종12) 윤 12월 1일에 일단락 된 《아악보》완성에 아악의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의 방법은 먼저 세종조 음악정비 과정을 살펴보고, 다음은 《율려신서》의 유입배경과 《율려신서》가 아악정비에 미친 영향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율려신서》의 유입은 태종(太宗, 1367~1422)의 큰아들 경녕군(敬寧君, 諱 裶)이 1419년(세종1) 8월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갔다가 그 해 11월 18일에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속에 《율려신서》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율려신서》는 1419년(세종1)에 유입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뒤 《율려신서》은 경연(經筵)의 강학 교재로 채택될 정도로 관심이 집중된 책인데, 특히 세종은 《율려신서》의 음악이론에 심취되어 그 이치를 깊이 탐미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뿐만 아니라, 황종 율관제정, 아악기 제작을 비롯해 1430년(세종12) 윤 12월 1일에 완성된 제사와 조회《아악보》의 악조이론 정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King Sejong opened the golden period of court music in his reign(1419~1450). That is, he developed institutional norms of 『Oryei(五禮儀)』 of five ceremonies: happy ceremony, bad ceremony, military ceremony, reception ceremony and auspicious ceremony. He reorganized various kinds of ritual music which were intended to admire military and literary achievements, morning assembly music, social visit music and entertainment music. It was enough to open the era of balance between the sky and the ground. Therefore, this study focused on the introduction of 『Yulryeosinseo(律呂新書)』 in the King Sejong’s period and its effect on reorganization of court music. It was believed that 『Yulryeosinseo』 was included in 『Seongridaejeon(性理大典)』 he brought when he returned home from Ming as an appreciation delegate in November 18, 1419. Then, 『Yulryeosinseo』 was an guideline to speculate subtle and delicate reason of music theory. As well, it was confirmed that it had a great influence on making court music instruments and organization of musical tones of court music.

【국문초록】

Ⅰ. 들어가기

Ⅱ. 세종조의 음악정비

Ⅲ. 세종과 《율려신서》의 만남

Ⅳ. 세종조 아악정비와 《율려신서》

Ⅴ. 나오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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