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때 국가는 다세를 부과하여 차를 공급받았지만 사찰에서는 주변 차밭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사들이 손수 차나무를 심고 차를 제다하여 음용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선사들의 차나무 재배와 제다에 대한 관심은 결국 조선조를 거쳐 현재 사찰 주변에 차나무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조정치적 억압에서도 차를 통해 선정을 닦아나가고 자득하는 마음을 찾았던 선사들의 노력이 한국 차나무의 생존 방법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구체적 노력이 선사들이 남긴 茶詩文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시대 차 재배와 생산에 관련한 다시문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총 12首인데, 그중 불교와 관련된 내용은 김시습, 부휴선사, 편양선사, 백곡대사, 혜장선사, 범해선사의 시 7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밭이나 숲에 차씨를 직접 심고 가꾸었음이 드러나며, 그 차싹을 이용해 차를 만들었다는 詩도 있다. 또한 차나무 재배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았어도 차나무가 곁에 있어야 가능했을 표현이 드러나는 시도 있어, 이러한 시구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차나무 재배 가능성을 고찰해볼 수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선사들이 남긴 다시 속에는 손수 차를 심고 가꾸고 제다하는 모습들과 차나무를 묘사하고 있음에서 차의 생산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선사들이 차나무를 손수 재배하여 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차생활의 아주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며, 조선전기 차재배의 실상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