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낙랑 한묘에서 출토된 일부 칠기에서는 명문이 확인된다. 명문 내용은 주로 漢蜀郡과 廣漢郡 工官, 考 工, 供工 등 칠기 생산과 관련된 기관에 대한 것으로서, 당시 칠기의 생산과 관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본 발표문에서는 낙랑 한묘 출토 칠기를 중심으로, 기타 지역에서 출토된 칠기도 함께 분석하여 漢代 칠기의 생산과 관리체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대 칠기의 생산과 관리체계에 관한 문헌기록은 매우 적은 편인데, 明代의 黄成은 『髹饰录·杨明序』 에서 “蓋古無漆工,令百工各随其用,使之治漆,固有益于器而盛于世。别有漆工,漢代其时也” 1 라고 한 바 있다. 한대에 漆工이 있었음은 칠기 명문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촉군과 광한군 공관 등에서 제작된 칠기의 명문에서 “髹工”, “上工” 등이 보이고 있다(표 1). 사실 湖北 云夢 睡虎地의 秦墓에서 출토된 칠기에서 “上”, “包” 등의 명문이 확인되고 있어, 늦어도 秦代에는 칠기 제작이 분업화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上”은 촉군과 광한군 공관 제작 칠기 명문의 “上工”의 上과 동일한 의미이다. 또 包는 飽와 같은 것으로서 㯡의 假借字이고 “髹工”의 髹와 동일한 의미로서 2 , 『說文解字·桼部』에는 “㯡, 桼垸已復桼之” 3 라 설명하고 있다. 결국 진한시 기에는 이미 칠기 제작을 위한 전문적인 수공업 기관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당시 木胎칠기는 ‘木器髹者’ 4 , 布 胎 칠기는 ‘紵器’ 5 , 金银銅釦칠기는 ‘釦器’ 6 라고 불리웠다.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촉군과 광한군 공관은 金銀釦器를 주로 생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문헌에서도 이와 관련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漢書·貢禹傳』 의 “蜀廣漢主金銀器, 歲各用五百萬. 三工官官費五千萬”이라는 기록에 대해 삼국-조위시기의 如淳의 주에 의하면 “『地理志』 河內懷, 蜀郡成都, 廣漢皆有工官. 工官, 主作漆器物者也.” 라 하였다 7 . 한대 칠기 생산기관 에는 漆工, 木工, 金工 등 다양한 장인들이 있었고 고급 칠기일수록 여러 장인이 참여하여 함께 제작하였는데, 서한 蜀郡 成都人 揚雄(기원전 53 ~ 기원전 18년)이 저술한 『蜀都賦』의 “雕鏤釦器, 百伎千工” 8 이라는 기록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1. 蜀郡과 廣漢郡의 工官

2. 도성에 설치된 考工과 供工

3. 결론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