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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시와 문학을 통해 본 이순신

Understanding Yi Sun-sin Through his Poetry and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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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칠년전쟁 동안 연전연승으로 왜적을 물리친 기쁨이 있었지만, 혼자서 감내해야 했던 고난과 시련도 많았다. 어떻게 그 고난의 극복하고 백절불굴의 우국충정을 견지할 수 있었을까? 공에게는 자신의 삶을 경영했던 비법이 있었는데 일기를 쓰면서 시를 읊었던 문학 활동이었다. 문학치료학의 관점에 보면, 공의 시작(詩作) 활동은 수많은 번민과 고뇌를 치유해 주는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시와 문학을 통해서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순신의 시는 2012년 까지 25수로 집계되었으나, 『李忠武公全書』 권15에 수록된 「無題 1, 2」 두 수가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의 작품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어, 그 근거 자료를 검토하여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순신의 시는 총 23수로 정리되었다. 이순신의 대표작 한시 ‘한산도야음’과 시조 ‘한산도가’의 작시 배경을 소개했다. ‘한산도야음’은 당나라 시인 노윤(盧綸, 748-800?)의 ‘화장복야한하곡(和張僕射寒下曲)’을 차운(次韻)하여 한층 더 차원 높게 쓴 작품이다. 시조, ‘한산도가’는 도체찰사 신숙주 휘하에서 야인들을 격퇴할 때(1460년) 별시위(別試衛)로 활약했던 박위겸(朴&#25757;謙)이 남긴 칠언절구를 가슴에 새겨두었다가 한산섬의 달 밝은 밤의 시름으로 화답하듯이 시조로 바꾸어 작시한 특이한 작품이다. 공은 한시를 한글 시조로 변환하여 우국충정을 노래한 특이한 방법을 선택했다. 이는 한시를 읽을 줄 모르는 수많은 백성들의 가슴에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노래였으며, 참혹한 전쟁에 시달리는 무지한 백성들을 위무하려는 삼도수군통제사의 마음의 선물이었다. ‘한산도가’에 대한 크게 두 가지 이견(異見)과 논쟁이 있었다. 첫째는 ‘한산도가’는 이순신의 시가 아니라, 황세득 장군의 작품이라는 주장이었다. 둘째는 ‘한산도가’는 1595년 8월 15일 한산도가 아니라, 1597년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저작되었다 주장이 보성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파급되고 있다. 한산도에서 4년 동안 이순신과 자주 만나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가리포 첨사 이응표 장군의 집안 족보에 오언절구 ‘한산도야음’과 한역(漢譯) ‘한산도가’에 대한 화답시 2수를 발견했다. 그 기록 첫머리에 “공이 한산도에 있을 때 이순신이 달밤에 읊은 시가 있었다(公在閒山島時李忠武 月夜有吟曰)” 라고 화답시를 쓰게 된 배경을 기록해 두었다. ‘한산도가’의 저작자에 관한 이견(異見)과 저작 장소와 시기에 관한 논쟁을 다음과 같은 정론(正論)으로 제시한다. 첫째로, ‘한산도가’는 이순신의 작품이 분명하고, ‘황세득 장군의 ‘한산도가’는 이순신의 원작을 모방한 화답이었다. 둘째로, ‘한산도가’는 1597년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1595년 8월 15일 한산도에서 작시된 것이 분명하다. 셋째로, 만약 이종학 선생이 발견한 필사본이 이순신의 친필이라면, 1597년 보성 열선루에서 한산도를 회상하면서 이순신이 다시 썼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산도가’를 분석하여 깊이 읽기를 소개했다. ‘한산도가’는 제한된 공간에서 확장된 공간으로, 즉 한 장수의 마음에서 온 나라 온 백성의 가슴으로 확산되는 과정이 극적으로 전개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촉매 작용처럼 피리소리가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절묘함이 있다. 특히 ‘한산도가’의 종장, ‘어디서 一聲胡&#31539;는’ 라는 구절은 칼끝에 번득이며 <수렴(收斂)-증폭(增幅)-융합(融合)-확산(擴散)>되는 달빛, 즉 우주 에너지가 변용되는 파노라마이다. 시각적인 이미지의 공간 축소와 압축으로 고조된 긴장감, 즉 장군의 시름이 피리소리, 즉 청각적 이미지로 융합되면서 에너지가 변환과 증폭이 이루어진다. 마치 방송국의 송신탑처럼 고주파수를 넓은 공간, 즉 피리소리의 공명에 실려서 온 세상으로 전송하게 된다. 무엇을 송신하는가? 그 에너지 속에 담긴 메시지는 마지막 어구 ‘남의 애를 끊나니’ 라는 공의 우국충정이다.

Winning every battle throughout the Seven-Year-War, Lee Sun-sin had not only great joy to beat off Japanese enemies, but hardships and trials to bear up by himself. How could he overcome such difficulties, and maintain his inmost feelings and unbending love for mother country? He had a secret formula to manage his life. It was his literary activity to write poems. According to the theory of literary therapeutics, his poetry was the source to cure his suffering and agony. The number of poems written by Yi Sun-sin was tallied 25 in 2012, but a question was raised that two poems, 「Untitled song 1, 2」 included in the chapter 15 of Yichungmugongjeonseo 『李忠武公全書』 are not the works of Yi Sun-sin, but that of Bae Young-gil(琴易堂 裵龍吉). So I verified it. They are not the works of Yi. I introduced the literary background of ‘Hansandoyaum’(한산도야음) and ‘Hansandoga’(한산도가) to understanding the life of Yi Sun-sin through his poetry and literature. Yi Sun-sin wrote ‘Hansandoyaum’, a quatrain with five Chinese characters in each line(五言絶句) in the manner of a borrowed rhyme(次韻) from the poem, ‘Whajangbokyahanhagok’(和張僕射寒下曲) of Noh-Yun(盧綸,748-800?) in the Tang age. He wrote ‘Hansandoga’ to convert a quatrain with seven Chinese characters in each line(七言絶句) written by Park Wi-gyeom(朴&#25757;謙) in 1460 to sijo(時調) as a reciprocation on Hansanseom island at a full-moon night. His method of poetical converting was unusual in poetry writing. It was impossible for all the innocent people who were illiterate to understand Chinese poetry. Hangeul sijo(한글 시조), ‘Hansandoga’ was handed down orally all over the country. It was a great achievement for him to plant a song to love mother land in all Korean people.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naval forces, Yi Sun-sin gave a warm present of mind to the people who were trapped by war and famine. Scholars hold different views on ‘Hansandoga’. One is that ‘Hansandoga’ was not written by admiral Yi, Sun-sin, but by general Hwang, Se-deuk. The other is that it was not written on the Hansando island on August 15th in 1595, but at Yeolseonru(열선루) in Boseong August 15th in 1597. I found that two responding poetry written by admiral Lee, Ung-pyeo who spent about four years on Hansando with admiral Yi, Sun-sin. His genealogy contains two poems responded to ‘Hansandoyaeum’ and ‘Hansandoga’. It is said that “when admiral Lee, Ung-pyeo served on Hansado island, admiral Yi, Sun-sin wrote two poems at full-moon night.” I suggest a reasonable argument on ‘Hansandoga’. First, ‘Hasandoga’ was writtten by admiral Yi, Sun-sin, and the poem of general Hwang, Se-deuk was its responding poetry. Secondly, ‘Hansandoga’ was not written at Yeolseonru(열선루) in Boseong August 15th in 1597, but on the Hansando island on August 15th in 1595. I introduce the literary criticism on Hansandoga. It has a dramatic structure that converts a restricted space to a extended world. This process is a kind of panorama that the moon light, the universal energy is gathered, amplified, fused, and proliferated with the sound of a reed at full-moon night on Hansando island. The panorama is also that the visual images of moonlight on a watch tower sublimate into the auditory ones by means of the plaintive sound of a reed. (*)

국문초록

Ⅰ. 서언

Ⅱ. 「無題」 2수의 작시자(作詩者) 검증

Ⅲ. ‘한산도야음’과 ‘한산도가’의 작시 배경

Ⅳ. 한산도가 정론(正論)

Ⅴ. 한산도가 깊이 읽기

Ⅵ. 결언

Abstract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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