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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3·1운동 초기 경성시위에 대한 세대론적 분석

A Generational Analysis of the Kyongsong Demonstration at the Beginning of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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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3·1운동 초기 경성시위에서 지식인들의 세대별 운동방식에 나타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고찰했다. 조선인 지식인들에게 3·1운동은 식민지기 예외적인 ‘기동전적 상황’이었다. 경성은 식민권력의 정치적·물리적 무게중심이자 인쇄소·학교가 밀집한 공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초기 경성시위는 조선인 지식인들에게 ‘공통경험’의 발원지였다. 청년 지식인으로서 ‘在京학생’은 능동적으로 대중시위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그들은 기숙사·하숙집·교회 등 ‘집합적 생활공간’에서 시위를 모의했다. 또한 1일 행진시 덕수궁에서 조의를 표하거나 각국 영사관에 독립의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행렬을 지휘하면서 총독부 청사로 행진을 시도했다. 또한 2차 시위인 5일 시위에서는 종로에서 모이지 않고 ‘경성의 현관’인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군중을 모았다. 그리고 비록 남대문에서 저지되었지만, 총독부 청사를 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1일 시위 이후에도 기성세대 지식인으로서 ‘京中유림’과 ‘在京유력자’들은 대중시위를 조직하기보다 소위 ‘민족대표 33인’의 운동방식에 규정되었다. 학생 2차시위가 있던 5일 ‘京中유림’은 청량리 고종 반우식에서 순종에게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총독부 경찰이 두려워했던 것은 낭독으로 인한 ‘대중 선동’이었다. 12일 조선민족대동단의 규합하에 일부 목사, ‘京中유림’이 일으킨 장서 사건도, ‘33인’의 후계자를 자임하며 총독에게 청원서를 바치고 불특정 군중에게 자신들의 대의를 호소했다. ‘청년-학생’들의 ‘대중시위’ 조직과 지도는 초기 경성시위의 중요한 특징이었고, 이 점에서 종래 기성세대 중심의 공론 형성은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점에서 ‘3·1운동 세대’의 등장을 논할 수 있다. 다만 3·1운동 당시의 청년은 그 이후의 청년은 아니었다. 이후 지식인들은 한반도 내의 정치체와 대중의 역할을 두고 분화했다.

This article considered ‘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 that appeared in the intellectuals’ generational campaign methods during the Kyongsong(京城) demonstration at the beginning of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This movement was an exceptional ‘maneuver warfare situation’ during the colonial period. Kyongsong was the colonial power’s political and physical center as well as the center of public opinions. Students structured and supervised a public demonstration. They plotted a demonstration in ‘collective living spaces’ like dormitories, boarding houses, and churches. And they attempted to march to the Governor-General Building on March 1st, and it seems like they were heading there on 5th. But even after the demonstration on March 1st, Confucian scholars and influential figures in Kyongsong were defined by the demonstration method of ‘the 33 Korean leaders’ as the intellectuals of the older generation, instead of staging a mass demonstration. Consequently, the traditional formation of public opinions around the older generation met its critical turning point. It is possible to discuss the emergence of ‘the generation of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Yet, the youth during this movement were not the same as the youth thereafter. Since then, the intellectuals were divided based on the political system and the roles of the public within the Korean peninsula.

1. 서론

2. ‘在京학생’들의 운동:

대중시위의 조직과 지도

1) ‘집합적 생활공간’:

기숙사, 하숙집, 교회(敎會)

2) 행진: 대한문, 각국 영사관,

그리고 조선총독부 청사

3. ‘京中유림’과 ‘在京유력자’들의 운동: ‘유력자’ 중심의 운동

1) 상소문과 격문 사이

- 3월 5일 청량리 고종 반우식 읍소 사건

2) ‘33인의 후계자’

- 3월 12일 12인 등의 장서 사건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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