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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 초기 자녀안(恣女案)의 적용 사례에 대한 연구

A Study on the Actual Applications of the Janyeoan Law in the Early Joseo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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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자녀안법(恣女案法)의 성립과 변화, 실제 적용 사례를 검토한 것이다. 고려 예종 때 만들어진 자녀안법은 1477년에 제정되어 경국대전에 실린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의 기원이 된다. 사문화된 이 법은 1406년의 허응(許應)의 요청으로 부활한다. 허응은 기존의법에 세 번 결혼한 추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것은 삼가를 비윤리적인 행위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여성의 결혼 횟수를 윤리적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1436년의 자녀안법은 삼가녀의 자손은 대성(臺省)과 정조(政曹)의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는 보다 구체적인 조항을 추가했다. 아울러 자녀안 녹안의 담당 관청으로 사헌부를 지정했다. 1485년에 완성된 경국대전(을사대전)의 재가녀자손금고법은 재래의 자녀안법의 강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성을 자손의 금고(禁錮)와 연좌한다는 발상은 자녀안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다만 삼가를 넘어 재가(再嫁)가 추가되었던 것이니, 을사대전의 재가녀자손금고법은 자녀안법의 과격한 연장인 셈이다. 재가녀자손금고법의 성립에는 수신전(守信田)의 박탈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 전에 자녀안법이 계속 강력한 형태를 띠면서 여성의 성과 자손의 금고를 연관시키고 있었고, 또 대간(臺諫)은 그 처벌성 조항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예컨대 1436년 이후 실제 자녀안이 작성되었고, 자녀의 자손은 대성(臺省)과 정조(政曹)와 정부(政府)의 관직을 얻은 자가 없었다. 이것은 자녀안이 실제 관철의 강도를 높여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녀안법의 집행은 매우 집요하였다. 세 번 결혼했던 왕씨의 자손들의 사환(仕宦)에 끊임없이 문제가 생겼던 것이 그 적실한 예다. 1429년 사헌부가 왕씨가 자녀임을 이유로 아들 김개의 우시직(右侍直) 임명을 철회 할 것을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1489년 김맹강의 상소까지 60년 이상 이 가문의 사환은 끊임없이 문제가 되었다. 왕씨의 자손은 왕실 및 명문거족과 통혼하는 집안이었지만, 그녀씨의 삼가는 계속 문제가 되었다. 한편 왕씨의 삼가는 허응의 법(1406) 이전에 있었고 또 그것은 왕명(태종) 에 의한 것이었다. 자녀안법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여성의 결혼횟수를 윤리적 판단의 준거로 삼는 것은 이미 원칙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1487년 김맹강의 상언 이후 실록에서 김개․김한의 후손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조선시대 문집에도 김개․김한과 그들의 아들들의 이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명문거족과 통혼하고 있었던 왕씨의 자손과 가문이 1487년 이후 실록과 문집 등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다. 자녀안법은 일종의 명예형이었다. 자녀에 왕씨의 후손들을 둘러싼 요란한 시비는 가문에 불명예가 되었을 것이다. 사족들은 자연스레 이 불명예스러운 가문과의 혼인을 기피했을 것이고, 그 결과 이 가문은 차츰 사족사회에서 배제되어 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배제야말로 여성들의 재혼, 삼혼을 막는 엄청난 압박이 되었을 것이다. 자녀안으로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자 한 남성-사족의 의도는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attempted to examine the establishment and developments of the Janyeoan Law and review its actual applications. Created in the reign of Koryo’s king Yejong, the Janyeoan Law later became the very basis of the Act of Restriction on Descendants of Remarried Women that was enacted in 1477 and published in Gyeongguk Daejeon. Little or not viable once, the Janyeoan Law was revived by Heo Eng’s request in 1406. He proposed to include a new clause in that law, which concerns the matter of women who got married three times, suggesting that women’s three-time marriage is unethical. The proposal marked quite an important ideological transition in which the frequency of marriage became a criteria to ethically judge women. In 1436, the Janyeoan Law had one more clause which provides that descendants of three time-married women are prohibited from being appointed any official of Daeseong or Jeongjo position. At the same time, Saheonbu was designated to be in charge of keeping the register of Janyeoan, making more probable the execution of strict punishments stipulated in that law. In 1485, the Act of Restriction on Descendants of Remarried Women was completed as part of Gyeongguk Daejeon(Eulsa Daejeon), resultantly strengthening the conventional Janyeoan Law. The idea that associates the sexual decision-making of women with restrictions on their offspring was catching up with the Janyeoan Law. What’s more, however, that idea included even descendants of twice-married women. This means that the Act of Restriction on Descendants of Remarried Women was a more severe extension of the Janyeoan Law. Apparently, detrimental to the establishment of the act was the deprivation of a land named Susinjeon. By the way, it was already before the establishment that the Janyeoan Law obviously went on associating women’s sexual decision-making with state restrictions on their descendants and that Daegan was trying to execute the restrictions that are sort of like punishments. For instance, the register of Janyeoan was actually made since 1436, after which no descendant of women who was listed in the register could be an official of Daeseong or Jeongjo position or any other governmental official. This indicates that the Janyeoan Law was getting more and more powerful in reality. The Janyeoan Law was executed so intensively. A good example is that for Kim Gae, Kim Han and their children, all of whom were descendants of Mrs. Wang who had gotten married three times, seeking the position of a governmental official always provoked debates that continued over 60 years from 1429 when Saheonbu called for cancelling the placement of Kim Gae in the position of Wusijik because he was a son of Mrs. Wang as mentioned above to 1489 when Kim Maeng-gang presented a letter of appeal for a name was Wang had been making marriage relationships with the royal court or distinguished family clans, the fact that none other than the Mrs. Wang got married three times went on emerging as a serious issue. Reasonably, by the way, some judged that the Janyeoan Law couldn’t be applied because the three marriages were not only done before the enaction of Heo Eng’s Law(1406), but also permitted by the then king(Taejong). This judgement was, however, not accepted. Here’s the point. At that time, it was taken for granted that the frequency of marriage is an ethical criteria for women. Since 1487 when Kim Maeng-gang presented an appealing document up to the king, the descendants of Kim Gae and Kim Han hadn’t been mentioned about any more in the True Records of Joseon Dynasty. In that vein, Kim Gae, Kim Han and their sons’ names had been completely disappeared in any collection of literary writings that were published in the Joseon period. These facts deserve to notice a lot. It is quite significant that the descendants of a family with the surname of Wang who had usually been having marriage relationships with distinguished powerful families were completely elim

1. 머리말

2. 자녀안(恣女案)의 제정

3. 자녀안의 적용 사례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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