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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4∙19 전조(前兆)로서의 1960년 초봄 지역 시민운동 ‘4∙19’의‘대학생-서울’중심사관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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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라는 용어는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주도해 정치혁명을 일으켜 이승만정부를 종식시켰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4∙19의 기원과 초기 국면에 주목하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과 1954년의 4사5입개헌, 1958년 12월 24일에 단행된 2∙4보안법 파동, 1959년 경향신문 폐간 등으로 헌정 질서를 교란했던 자유당 정부는 정당성 위기를 자초했고 이를 시위로 반전시킨 세력은 시민들이었다. 1960년 3∙15선거 전 사회운동의 중심에는 2월 28일의 대구를 비롯한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있었으며 3∙15선거 직후에는 마산의 시민들이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부는 장면 민주당 후보의 대구 유세에 대한 학생들의 참석을 막기 위해 2월 28일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대구 지역 고교생들은 이에 반발해 집회를 가졌다. 이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9일까지 고등학생들의 전국적인 반정부 집회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3월 15일 부정선거는 자행되었다. 경남 마산에서는 3월 15일 개표 전후‘선거무효’를 외치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숨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당시 김군의 사진이 도화선이 되어 2차 마산 시위가 벌어지면서 반정부 투쟁이 4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4∙19[서울-대학생]혁명’은 1960년 봄 고등학생 등 시민들의 지역적 사회운동에서 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4∙19라는 명칭 보다 ‘1960년 봄 전국적 사회운동’이라는 표현이 초기 여러 지역에서 분출되었던 다양한 사회운동과 자연발생적 항거(의거)를 포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The naming such as ‘4∙19 Revolution’ is a Seoul-centered and collegestudent- biased definition. In the early spring of 1960, a lot of antigovernment movements arose among middle and high school students and citizens on the local level. 2∙28 high school protest in Daegu and 3∙15 citizen’s movement in Masan was escalated to the 19th of April revolution. Those local movements were preludes to the April Revolution of Korea. The dominant historical term of ‘4∙19 Revolution’ should be changed into ‘the citizen movements in the spring of 1960.’

Ⅰ. 문제의 제기와 연구의 목적

Ⅱ. 기존연구의 검토

Ⅲ. 3∙15 직전의 정치적 상황

Ⅳ. 2∙28 대구민주운동: 4∙19의 전조가 된 고등학생시위

Ⅴ. 3∙15선거와 그 즉각적 반응: 마산의거와 이승만의 인지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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