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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 민족주의 - 김구 노선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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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김구는 해방에서 분단에 이르는 건국 과정 동안 일관된 민족주의, 자주, 이상주의, 통일 노선의 표상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해석은 자주 대 외세, 민족 대 반민족, 분단 대 통일, 현실과 도덕의 양분법에 입각하여 해석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동시에 김구가 말하는 바를 일차자료를 통해 재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분법을 넘는 동시에 일차 자료에 바탕해 분석한 결과 권력의지, 현실성, 정치연합, 선거거부주의와 같은 보편적 준거를 적용할 때 자주, 민족주의, 반공, 통일 중 어느 하나의 단일표제로서 김구의 정치노선을 규정하기는 불가능하다. 건국 시기 동안 김구의 건국 노선은 임정봉대론, 반공반탁론, 단독정부론, 남북협상론, 양군철퇴론으로 매우 빠르게 변화하였다. 김구는 특정 국면과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단일 표제주의를 추구하였지만 상황의 변화와 함께 또 다른 선명한 단일표제주의를 추구하는 자기부정과 전환을 수차 감행하였다. 특히 그는 1946년 초 가능의 국면에서는 권력독점을 추구하여 주권회수와 북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폭력적 제거를 시도하여 좌우 분열을 최고조로 강화시켰다가 1948년 권력 상실의 시점에서 갑자기 공산주의자와의 연대를 추구하며 선거거부주의를 결행하였다. 반공에서 연공으로, 건국에서 통일 노선으로, 제도건설에서 참여거부로의 급격한 전환이었다. 김구는 남북협상을 추구하기 직전까지 남한 단독정부를 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일정부라고까지 정당화하였고, 이승만과의 동일 노선을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김구 건국 노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은 자주성의 추구 및 국제성의 결여, 이상주의, 그리고 권력의지와 정치연합 대상의 빠른 변화였다. 특별히 한국문제의 국제적 지역적 본질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그가 추구하는 자주 노선의 이상성을 높인 대신 현실성을 크게 낮추었다. 이는 목적윤리의 추구, 책임윤리의 결여로 요약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권력의지 문제에 비추어 김구는 권력의 독점, 또는 우파 내의 상당 지분을 추구하다가 패배로의 귀결이 명확해진 순간 정치연합의 대상을 이승만에서 공산주의자들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선명했던 반공노선을 중단하고 연공으로 전환하였다. 즉 김구의 경우는 이상주의의 전형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권력의지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김구의 사례는 한국 민족주의 이상의 한 실패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짧은 시기 동안 계속 변화한 단일표제주의를 넘어 그의 건국노선을 균형적으로 해석하여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의 관점에서 어떻게 통일을 추구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가려배울 것인가가 현금의 한국민족주의 앞에 놓여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김구 및 김구민족주의에 대한 오늘의 연구가 갖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As we know well the nationalist mentality and yen in Korea is so strong and persistent. Especially one of th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leader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Kim Koo, is still being regarded as a representative symbol of nationalism. Many Korean people deeply admire him as a figurative leader of unification movement and national self-reliance during the state-building period, from a perspective of dichotomy ? division vs. unification, national vs. anti-national, self-reliance vs. dependence. However, based on the raw materials, he changed many times his political lines and coalitions from in a very short time. Right after the liberation, at first he pursued the exclusive legitimacy of the 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KPG) during the colonial period. Under the trusteeship imbroglio, he tried to kill North Korean communist leaders. But he moved from extreme anti-communist position to left-right coalition/North-South association. Also he changed his political alliance from rightist to communist, from Syngman Rhee to North Korean communist. Of course, he supported Syngman Rhee and the establishment of separate government in South Korea until the end of 1947, then he called it as a unified government, a legitimate successor of the KPG. But abruptly he attacked the building of South Korea as a national division and a divided government. He abruptly changed from presentism to absentism. in the issue of the national founding election in 1948. Why Kim Koo changed many times so suddenly? First of all he did not know the international and regional dimension of the Korean question. His self-reliant perception of the Korean problem was very impractical. He also lacked the sense of realism to realize his idea. But his will-to-power was really strong. Then he would change his ideological-political line and partnership so many times in a very short time, without sense of responsibility. We can safely say Kim Koo, as a political leader, lacked the ethics of responsibility from extremism, but had the moralism of purpose. That was a general idiosyncratic habit of Korean nationalism.

Ⅰ. 문제의 제기

Ⅱ. 해방, 탁치대쟁, 그리고 임정봉대

Ⅲ. 미소공위, 평양회합, 그리고 국가건설

Ⅳ. 국가건설과 건국 이후

Ⅴ. 평가와 해석의 문제

Ⅵ. 결론에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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