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중, 프랑스의 항독 레지스탕스 활동에는 드골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세력과 장물랭을 대표로 하는 공화주의자 그룹,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들이 함께했다. 일제에 저항하던 조선인들 중에도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파 민족주의자 그룹, 의열단 등을 꾸려 무장투쟁을 전개한 아나키스트 그룹, 농민들이 중심이 된 의병, 박헌영, 조봉암 등 공산당 계열의 좌파 지식인 그룹 등이 총망라돼 싸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함께 해방을 맞은 좌우의 레지스탕스들은, 나치협력자들에 대한 청산작업에도 당연히 함께 임했다.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은 프랑스가 완전히 나치로부터 해방된, 공식적인 종전기념일 인 1945년 5월 8일보다 1년 앞서 진행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 6일)이 성공한 후, 마침내 파리가 탈환(1944년 8월 25일)되면서, 샤를 드골은 프랑스 임시정부(1944~1946년)의 주석으로 취임하며, 민족반역자들과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청산작업을 천명한다. 공식적인 재판을 통한 청산의 과정은 1945년부터 시작됐지만, 각 지역별로 다른 날짜에 해방을 맞이한 프랑스 전역에선, 군사재판과 시민법정을 통해 노골적인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해 갔다. 해방을 맞이한 기쁨과, 그동안 나치에 협력하며 유대인들과 레지스탕스 학살에 가담하던 자들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분출되면서, 개인적인 보복이 이뤄지는 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해방 프랑스군이 주축이 된 군사재판과 레지스탕스 세력이 중심이 된 인민재판의 절차를 거쳐,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처형과 수감이 결정됐다. 1944년부터 1945년, 약 1년에 걸쳐 9천 명이 이 같은 즉석재판을 통해 처형됐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독일군과 관계를 맺어온 여성들에게는 공개적으로 머리를 삭발하고, 그 모습 그대로 거리를 걷게하는 모욕의 형벌이 가해지기도 했다. 이 숫자는 대략 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부역 언론인과 지식인, 최우선 처단
좌우가 함께 행한 부역자 청산
프랑스의 친나치 청산, 가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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