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 글에서 융엘의 삼위일체론이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문화적 삼위일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BR> 첫째로 그의 삼위일체론이 바르트의 내재적 삼위일체론뿐만 아니라 라너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화를 수용하다 보니, 그것이 장점이면서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oikonomia)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음을 강조하다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에만 한정시키고 있다고 비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 또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고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영원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십자가의 신의 죽음을 거부하다 보면 내재적 삼위일체가 확고해 지겠지만 니체의 비판은 피해갈 수 없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면 양자의 삼위일체론이 통합될 수 있는 가능성과 필연성은 무엇 인가? 이 문제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BR> 둘째,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정이라는 이해는 아우슈비치 이후의 신(요나스) 이해의 난제인 타자의 고난에 답이 될 수 없다는 비판(레비나스)에 직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공관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이해도 제한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비밀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는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BR> 셋째, 오늘날 우리시대의 신학자들은 어떠한 근거 위에서 삼위일체론을 정당화하고자 하는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역사적(판넨베르크) 이해나 사회적(몰트만) 이해를 넘어 문화적 이해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특히 포스트모던 시대속에서 삼위일체론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융엘은 영원하신 죽을 수 없는 하나님(내재적 삼위일체)과 십자가에서의 죽은 하나님(경륜적 삼위일체)의 상응관계를 십자가에서의 부재하나 현전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답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답은 삼위일체가 너무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종래의 비판에 다시 직면해야 한다.<BR>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문화적 삼위일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필자는 ‘문화적 삼위일체론’ 이라는 용어로 현대 문화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식하거나 말할 수 있는 가능 근거를 되묻는 일을 하고자 한다. 현대
초록<BR>1. 들어가는 말<BR>2. 되어감 속에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BR>3. 세상의 비밀이신 삼위일체 하나님<BR>4. 사랑이신 하나님: 삼위일체 신앙의 십자가 신학적 매개<BR>5. 융엘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평가<BR>6. 문화적 삼위일체론의 필요성<BR>7. 나오는 말<BR>참고문헌<BR>Abstrac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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