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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예후 혁명과 신명기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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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한때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개방성을 통해 외교정치 무대에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던 오므리 왕조가 아합의 아들 요람의 통치 기간에 이르러 처음으로 뚜렷하게 그 허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람은 모압 지역을 상실하였고, 요단 동편 지역을 차지하려는 다메섹의 하사엘과의 치열한 전쟁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가운데 엘리사를 중심으로 한 예언자 그룹, 레갑 족속과 같은 보수적인 야웨 종교의 추종자들, 그리고 예후를 중심으로 한 군부 조직의 일부 세력 사이에 저항을 위한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다. 왕하 9-10장은 신실한 야웨 종교 세력의 후원을 받은 예후가 요람과 이세벨과 오므리 왕조에 속한 모든 후손들을 몰살시키고, 사마리아에 있던 바알 신전과 제의 추종자들을 대량 학살하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위에 오르게 된 과정을 보도하고 있다. 예후 혁명은 “야웨를 위한 열심”(왕하 10:16)으로 일어난 사건이며, 처음부터 종교적 합법성을 인정받은 쿠데타였다. 왕권의 적극적인 보호아래 이루어진 이교 제의의 유입과 확장에 자극을 받은 야웨 종교가 예후 혁명을 통해 강력한 비타협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예후 혁명은 이스라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겨놓았는데, 야웨 종교는 끊임없이 바알 종교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단절시킬 때에만 “참된” 종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신학적 유산을 후대에 남겨준 것이다.<BR>&nbsp;&nbsp;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과도 같은 예후 혁명을 진술하고 있는 현재의 본문들은 오랫동안 주도면밀한 확대과정을 겪은 후에 탄생된 최종의 편집적 결과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후 혁명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보도하고 있는 본문들을 하나의 문학적 단일체로 간주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존재하던 옛 전승은 계속적인 성장과 기록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옛 전승이 신명기사가(DtrH)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들어오게 되고, 후에 최종 본문으로 확정되기 전까지 예후 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본 논문은 여러 가지의 다양한 역사 신학적 색깔을 동시에 비추고 있는 예후 혁명의 의미를 편집사적 관점에서 좀 더 깊이 있게 파악하려는데 있다. 이를 위해 신명기사가(DtrH)의 편집 기술이 예후 혁명과 관련된 옛 전승에 어떻게 적용되었는가를 살펴보고, 후대에(DtrP) 신학적으로 확

초록<BR>1. 들어가는 말<BR>2. 예후에 대한 신명기사가(DtrH)의 평가<BR>3. 예후 혁명 보도의 신명기사가적 개작(DtrP)<BR>4. 예후 혁명에 관한 원래적 전승<BR>5. 나가는 말<BR>참고 문헌<BR>Abstract<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