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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瞿佑와 金時習의 創作動機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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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김시습(『금오신화』)과 구우(『전등신화』)의 창작동기를 상호 비교한 글이다. 먼저 구우가 『전등신화』를 창작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그는 원말영초의 문인으로 소년시절부터 원나라 말의 시인들로부터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크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구우는 원나라-명나라의 교체라는 사회적 격변으로 말미암아 시인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었다. 그는 전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사랑했던 연인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고, 명나라 건국 후에도 인화ㆍ임안 등의 하급 교사직인 훈도(訓導)로 근무하게 되어 시인 겸 관료로 활약해보려는 어린 시절 구우의 포부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구우의 개인적 체험은 『전등신화』창작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연방루기」ㆍ「위당기우기」ㆍ「취취전」ㆍ「추향정기」등의 애정전기소설에는 그의 실연체험이 반영되어 있으며, 「수궁경회록」ㆍ「삼산복지지」ㆍ「용당영회록」ㆍ「부귀발적사지」등에는 원말명초 사회에 대한 구우의 비판과 풍자가 내재되어 있다. 다음으로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창작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구우의 창작동기와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는 소년시절 세종으로부터 시창작 재능을 칭찬 받을 정도로 조숙한 천재였으나 10대 후반부터 모친과 외조모의 별세ㆍ부친의 재혼 등 여러 가지의 개인적 불행을 체험한다. 그 후 마음을 다잡고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자 그는 큰 충격을 받아 일평생 유교적가치관의 동요를 겪는다. 김시습은 마음의 번민을 억누르지 못하여 승복을 걸친 채, 관동ㆍ관서ㆍ호남지방 등을 몇 년 동안 방랑하면서 자신의 고뇌를 시를 지어 표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김시습은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정서와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을 시로써 표출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방랑을 끝내고 금오산에 일시 정착하던 중, 김시습은 구우의 『전등신화』를 우연히 열람하게 된다. 김시습은 운문과 산문이 결합되어 있는 전기소설의 표현수법과 문체에 대해 공감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김시습은 『전등신화』의 예술형식을 빌어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과 회재불우의 정서를 『금오신화』에 담게 되었다. 비록 김시습이 『전등신화』의 예술형식을 빌렸지만, 『금오신화』에는 김시습 자신의 독특한 표현수법과 주제의식 등이 들어 있다. 예컨대 『금오신화』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삽입시와 산문 등은 당대사회에 대한 김시습의 비판정신과 회재불우의 정서 등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시인으로서의 이상이 좌절된 회재불우의 정서 및 당대사회에 대한 비판정신 등이 구우와 김시습이 전기소설을 창작하게 된 가장 주요한 동기라고 할 수 있겠다.

〈국문초록〉

Ⅰ. 緖言

Ⅱ. 瞿佑의 創作動機

Ⅲ. 『金時習』의 創作動機

Ⅳ. 結論

參考文獻

〈摘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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