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芝?의 「서행록」(1828)은 홍순학의 「연행가」(1866)와 더불어 19세기 연행가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홍순학에 견주어 그동안 작가 김지수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없었다. 즉 작가와 작가가 처한 정황을 알지 못한 채, 家集 텍스트 만을 대상으로 하여 「서행록」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최근 ‘芝?’는 金老商(1787~1845이후)의 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正使 李球(1788~1836, 南廷君)의 伴?으로 참여한 김노상이 곧 김지수이며 그가 「서행록」의 작자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김노상이 당시의 청대 시인 張際亮(1799~1843)과 특별한 인연을 맺으며 긴밀하게 교유한 사실이 그가 남긴 시를 통해 상세히 밝혀졌다. 이 논문은 최근의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이 연행가사의 작자 김노상의 이력과 「서행록」의 특성을 보다 심층적으로 조명하고자 하였다. 김노상은 그동안 白衣 寒士로 알려졌는데, 족보가 계행보 등에 의거 그는 명문 경주김씨의 후예로서 경화사족의 일원이며, 또 조모·증조모가 모두 전주이씨 종실의 따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가 남연군의 반당으로 선발된 데에는 이러한 가문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김노상이 서울 명문가의 자제라는 사실은 「서행록」을 새롭게 해석할 중요한 단서이다. 즉 「서행록」과 「연행가」는 경화사족의 자제가 지은 장편의 기행 가사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녔다. 특히 「서행록」은 경화사족 장편의 가사가 집중적으로 산출되던 1860년대보다 수십년 먼저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19세기 경홧족 장편 가사의 선성이라 말할 수 있다. 김노상 일행은 연경에서 장제량 등을 우연히 만나, 두 달 동안 10여 차례 연회를 가지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 특히 장제량은 김노상의 적극성과 관후함에 감복하여 장편고시 「別使」편을 짓는 등 조선의 사절과 절친하게 소통하였다. 「서행록」의 음식치레, 술치레, 청대 과거제도 묘사 등은 이러한 환대의 자리에서 얻은 체험과 정보를 담은 것이었다. 이 작품이 일반적 遊覽誌의 성격을 넘어 보다 내밀한 체험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장제량과의 교유로 인해서였다. 「연행가」가 「서행록」의 성취에 결정적으로 못미치는 이유도 이러한 상호 환대의 체험의 부족에 있었다. 또한 「서행록」의 1차적 창작동기는 홀어머니인 68세의 모친 延日鄭氏(1761~1845)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즉 여성 독자를 의식하고 창작된 가사였다. 그 결과 여성들의 관심을 가질 만한 연경의 풍물과 인정세태가 「서행록」에 다수 포착되었고, 口語的 생동감이 특히 강조된 작품이 되었다.
「Seohhaengrok」 known as it was written by Kim Ji Su in 1828, has been mainly read in an aspect of Travel Gasa in the meantime. There have been attempts of precise interpretation of Gasa texts but there is still lack of explanation in historical investigation of writers, writing backgrounds, the trends in relation with the intellectuals in Yenching in Ching period. This study focuses on looking at 「Seohhaengrok」 as principle records of the literary men’s exchange between Joseon and Ching in the 19th century, and aims to empirically investigate unsatisfied things with new data in the present time. As the result of this study, it was found that the writer of 「Seohhaengrok」 was after Kim Noh Sang(1787 after 1845) and that ‘Jisu’ was a pen name for him. The reason that Kim Noh Sang played a role of Namyeongun of royal family as an individual capacity was because he was a descendant of Gyeongju Kim family that was one of influential noble families in Seoul, and because his grandmother was King’s granddaughter. This fact is totally irrelevant to the commonly held view of his social standing, a position with no government official which was similar to that of Uigwan who wrote 「Buyeonilgi」. The primary creation motive of 「Seohhaengrok」 was to provide his single mother Yeon Il Jeong (1761~1845) age 68 with a reading material. That is to say, it was a Gasa created in terms of women readers. As a result, this writing frequently captured a series of scenery and the humanity social condition parts in Yenching that might have been interesting to women. Also, that point brought his Gasa to a writing filled with colloquial emotions. At the time in Yenching, Kim Noh Sang by change met a Ching’s poet, Jang Je Ryang (1799~1843) and continually met him more than 10 times exchanging good friendship with each other. Such experience of mutual hospitality affected the lines of 「Seohhaengrok」, and so his writing became one beyond a writing of simply describing traveling places.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경화사족 김노상과 그의 가계
Ⅲ. 김노상과 장제량의 특별한 교육
Ⅳ. 「서행록」의 창작 동기와 그 특성
Ⅴ. 맺음말
參考文獻
Abstr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