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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동학농민전쟁기 경상도 유림의 향약 시행

Gyeongsang-do(慶尙道) Yurim(儒林)’s Enforcement of Hyangyak(鄕約) in the period of Donghak(東學) Peasan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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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동학농민전쟁기 경상도 유림들이 시행한 향약을 세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 살펴본 것이다. 향약은 16세기 이래 향촌 자치의 명분이자 교화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기의 유림들은 향약을 동시다발적으로 시행하며 동학의 확산을 방비해 나갔다. 그 첫 번째 경향은 동학농민전쟁 이전 동학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향약 시행이다. 당시 정부와 유림은 동학 확산의 원인을 교화가 밝지 못한데서 찾았다. 이에 1864년 성주의 유림이원조가 응지소를 올려 전국적인 향약 시행을 건의하였다. 1890년대 초반 경상도에서는 경상도관찰사 이헌영 주도로 향약이 시행되었다. 이때 결성된 향약 조직 중에서는 동학농민전쟁기까지 유지되며, 자연스레 반동학·반농민군 활동을 전개한 경우도 있다. 두 번째는 동학농민전쟁기 직접적으로 농민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른바 민보군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향약이 활용되던 경향이다. 이 시기 민보군 결성은 동학농민군에 대한 유림들의 가장 적극적인 대응이었다. 그런 가운데 의흥과 상주의 민보군은 향약의 조직과 운영 규정을 차용하 기도 했다. 민보군에 향약이라는 외피를 입힘으로써, 민보군 조직의 존재와 운영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 외 진주 백곡과 밀양의 퇴로 동에서도 기존의 동약 조직을 활용하여 민보군 조직을 결성하려 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세 번째는 동학농민전쟁기 또는 그 직후 향촌사회를 수습하고 안정 시키는 과정에서 향약을 시행하던 경향이다. 이들은 향약 시행을 통해 하층민이 농민군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동학 세력이 향리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이 물러간 후에는 동학 세력을 색출하고 귀화시키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하였다. 이에 거창에서는 농민군 축출 후 향촌 안정을 위해, 고 령에서는 농민군 진압이 완료되었지만 잔존 동학 세력을 색출하기 위하여 수령과 지역 유림들이 향약을 시행하였다. 합천에서도 농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하층민의 유출과 동학 세력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향약이 활용 되었다. 또 예천 금곡에서는 잔존 동학 세력에 대한 색출과 통제를 위해 동약을 시행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hyangyak enforced by Gyeongsang-do yurim during the period of Donghak Peasant War largely with three trends. After the 16th century, hyangyak became positioned as the justification of hyangchon’s self-governing as well as the means of reformation. Also, in the period of Donghak Peasant War, yurim were preparing for the spread of Donghak while enforcing hyangyak all at once. The first trend was to enforce hyangyak as a means of interfering with the spread of Donghak before Donghak Peasant War. At that time, the government and yurim found the cause of Donghak’s spread from the people not properly enlightened. Accordingly, in 1864, Seongju(星州)’s yurim Lee Won-jo(李源祚) submitted eungjiso to suggest the nationwide enforcement of hyangyak. Gyeongsang-do governor Lee Heon-yeong(李 永) led the enforcement of hyangyak in Gyeongsang-do during the early 1890 s. Some of the hyangyak organizations formed then were maintained until the period of Donghak Peasant War and naturally developed anti-Donghak and anti-peasant army activities. The second trend was to use hyangyak in order to fight against the peasant army directly during the period of Donghak Peasant War with the process of operating Minbogun(民堡軍). The formation of Minbogun in that period is regarded as the most aggressive coping of yurim with Donghak peasant army. In the meantime, Uiheung(義城) and Sangju(尙州)’s Minbogun did borrow hyangyak’s rules of organization and operation. By adding the exterior of hyangyak to Minbogun, the existence and operation of Minbogun organizations gained neo-Confucian justification. Also, in Baekgok(柏谷) of Jinju(晉州) and Toero-dong(退老洞) of Milyang(密陽), too, we can capture the movement of them to form Minbogun organizations using existing dongyak(洞約) organizations. The third trend was to enforce hyangyak in the process of settling down and stabilizing hyangchon communities during or right after Donghak Peasant War. They enforced hyangyak in order to prevent the lower class from joining the peasant army, keep Donghak force away from Hyangri(鄕里), and also screen and naturalize Donghak force after Donghak peasant army was driven off. In fact, in Geochang(居昌), after the peasant army was removed, they tried to stabilize hyangchon. In Goryeong(高靈), the peasant army was suppressed completely, but to screen remaining Donghak force, the head and local yurim enforced hyangyak. In Hapcheon(陜川), too, hyangyak was utilized as a means to prevent the lower class from leaving and Donghak force from entering while the peasant war continued. Moreover, in Geumgok(金谷) of Yecheon(醴泉), dongyak was enforced to track down and control remaining Donghak force.

Ⅰ. 머리말

Ⅱ. 동학농민전쟁 이전 동학 인식과 향약 시행

Ⅲ. 동학농민전쟁기 민보군과 향약

Ⅳ. 동학농민전쟁기 향촌 안정과 향약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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