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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정인보의 「석천유고기(石泉遺稿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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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1일에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주최하는 다산학술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번 학술대상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이 수상했는데, 이를 축하하는 인사말에서는 국학연구원보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 선생과 홍이섭(洪以燮, 1914~1974) 선생의 이름이 많이 거론되었다. 국학연구원의 전신이 1948년에 설립된 동방학연구소이고, 동방학연구소의 기반에는 두 분의 학문적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필자가 처음 논문을 작성할 때에도 두 분의 학문적 성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필자의 첫 논문은 정약용과 홍석주의 상서 연구서에 나타난 정치사상을 비교한 것인데, 홍이섭의 「홍석주(洪奭周)의 상서보전(尙書補傳)」(한국사의 방법, 탐구당, 1968)이란 짤막한 글을 읽은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논문은 정약용과 신작의 육향제(六 鄕制) 논쟁을 정리한 것인데, 이는 규장각에 소장된 신작의 석천유고(石泉遺稿)를 열람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석천유고는 정인보가 편찬한것이다. 정인보가 작성한 「석천유고기(石泉遺稿記)」는 석천유고의 권말에 있는 발문에 해당하며, 그의 문집인 담원문록(薝園文錄)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1937년에 정인보가 석천유고를 편집하고 작성한 글인데,조선후기 학계의 동향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잘 나타난다. 게다가 이글이 작성된 시점은 정인보와 안재홍(安在鴻)이 여유당전서를 교열 간행하고, 조선학(朝鮮學) 운동이 진행되면서 ‘실학(實學)’에 대한 연구가 등장하던 때임을 감안한다면, 이 글을 재독(再讀)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이하에서는 「석천유고기」 전문을 몇 개의 문단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한다. 원문의 번역은 정인보의 따님인 정양완 선생이 역주한 담원문록(태학사, 2006)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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