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저널
1778년 음력 8월 20일, 문초(文初) 신광하(申光河, 1729∼1796)가 홀연히 홀로 금강산으로 떠난다. 어언 오십, 그간 맛본 쓰라림과 참담함을 말로해서 무엇하랴. 충청도 한산(韓山) 숭문동(崇文洞) 고향집을 떠나와 과거시험장에 드나든 지가 수십 년, 형님 두 분과 함께 삼형제가 시험장에 나섰고 나중에는 조카들과 나란히 앉아 시험을 치렀다. 비 오는 어느 날에는 애써 시험장을 외면하는 호기도 부려보았으나 백두서생의 꽉 막힌 환로가 열리지는 않았다. 고단한 지천명을 곱씹고 있던 차, 다시 시험 날이다가왔건만 당일 새벽 그는 봇짐 하나를 꾸려 동소문(東小門)을 나선다. 사무친 서른 해 동안의 꿈, 금강산 결행이었다. 8월 20일에 도성을 떠나 10월 17일에 돌아오기까지 왕복 2천여 리의금강산 56일 기행은 잊을 수 없는 시문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시집 「동유록(東遊錄)」과 기행문 「동유기행(東遊紀行)」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동유(東遊)를 결단한 그는 20일에 목만중(睦萬中)과 혜환 부자(惠寰父子), 곧 이용휴(李用休)와 이가환(李家煥)에게 이 사실을 알려 시문을 받았으며, 21일에는 창동(倉洞 : 현재의 남대문 시장 부근 남창동 일대) 저택에서 조카인 신위상(申渭相), 신석상(申奭相)과 이별의 시를 지었다. 날이 새면 과거 시험이 열릴 참이었지만 「새벽에 도성문을 나서며(曉出都門)」 그는 이렇게 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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