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제택(第宅)은 인평 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집이었다. 인평 대군은 능양 대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인조반정으로 임금의 아들이자 임금의 동생이 되었다. 봉림 대군과 인평 대군은 조양루(朝陽樓), 석양루(夕陽樓)를 마주 보게짓고 방울을 단 동아줄로 연결하여 서신을 왕래하고 안부를 물었다. 석양루는 한때 여종 득옥(得玉)의 귀신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고, 이웃에서 꽃나무를 베어다 땔감으로 쓰는 모욕을 맛보기도 했다. 또 인평 대군의6대손 채중(寀重)은 구(球)로 이름을 바꾸고 은신군(恩信君)의 후사가 되어고종의 조부인 남연군(南延君)이 되었다. 1792년에 정조의 명으로 그려진 규장각 소장 「인평대군방전도(麟坪大君房全圖)」와 포천 왕방산 인평 대군 묘 앞에 서 있는 역대 왕들의 치제문은왕실 우애의 곡절을 담고 있다.
1. 「인평대군방전도」와 석양루
2. 석양루, 성쇠(盛衰)의 극치를 맛보다
3. 영삭(鈴索), 왕실 우애의 고사로 남다
4. 역대 왕들의 치제문과 우애의 반추
5. 글과 그림으로 남은 석양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