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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한명회 사후 압구정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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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狎鷗亭)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서(別墅)다. 『열자(列子)』의 고사 가운데 기심(機心)을 잊고 갈매기와 친압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압구정은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재상 한기(韓琦)의 서실 이름이었다. 한기는 세 임금을 왕위에 올리고 국정을 안정시켜 이름을 떨쳤다. 한명회는 한기의 공로를 자신에 견주어 정자를 압구정이라 명명하였다. 한명회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종조(從祖)인 한상덕(韓尙德) 밑에서 자라났다. 과거에 여러 차례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거듭하였는데 권람(權擥, 1416~1465)의 추천으로 마침내 관직에 진출하였다. 한명회는 수양 대군(首陽大君, 세조)과 교분을 맺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왕위 찬탈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후 최고의 권세를 누리다가 강호로 물러날것을 빙자하여, 한강의 두모포(豆毛浦)에 압구정을 건립하였다

압구정의 재건과 유영경의 압구정

진평군 이택과 압구정의 성세

19세기 압구정의 변천사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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