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는 옛 문헌에 평소 궁금하게 여기던 내용이 나오면 무척 반갑다. 성균관대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엄(柳儼, 1692~1752)의 성암잡고(省菴雜稿)도 그러하다. 유엄은 본관이 진주(晉州)로 중종반정의 공신 유순정(柳順汀)의 후손이지만 그 후손 중에 크게 현달한 사람은 나오지 않았으니 조부 유관(柳綰),부친 유정진(柳挺晉) 등은 사마시(司馬試) 방목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젊은 시절 사간원 정언과 헌납, 홍문관 수찬과 교리, 사헌부 집의, 승정원 승지 등을 거쳤으니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오래 승정원에 서 근무하여 영조를 지근의 거리에서 모셨거니와 영조의 탕평책에 호응하여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강경한 소론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대사간, 전라감사, 충청감사, 도승지, 황해감사, 대사헌, 경기감사, 한성판윤, 예조판서,공조판서, 형조판서 등 청요직을 두루 지내고 청양군(菁陽君)에 봉해졌으니, 당대에 명환의 반열을 회복하였다 하겠다. 유엄은 자가 사숙(思叔) 혹은 숙첨(叔瞻)이고 호는 성암(省庵), 파강만어(巴江晩漁), 오산노초(梧山老樵) 등을 사용하였다. 오산(梧山)이 어딘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곳에 선영이 있었기에 오산노초라 한 것이고, 중년이후 양천(陽川)에 별서를 경영하여 파강만어라 한 것이다.1 성암은 경저에있던 그의 서재로 추정된다. 이병연(李秉淵), 이하곤(李夏坤), 조현명(趙 顯命), 조문명(趙文命), 이광덕(李匡德), 이종성(李宗城), 이일제(李日躋),조하망(曹夏望), 박문수(朴文秀), 정우량(鄭羽良), 조상정(趙尙鼎), 송인명, 정내교(鄭來僑) 등 당대 이름난 문인들과도 친분이 깊어 그들과 주고받은 글이 제법 있다. 유엄의 저술은 문집 󰡔성암잡고󰡕만 전한다. 성암잡고는 유일본으로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필사본이며 1책이며 권은 나누어져 있지 않다. 1책에 시(詩)와 서(序), 발(跋), 서(書), 록(錄)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고 2책에는 주로 묘지(墓誌)와 제문(祭文)이 실려 있다. 이이(李珥)의 석담구곡도(石潭九曲圖) 병풍에 붙인 <제석답구곡도병(題石潭九曲圖屛)>, 양화나 루에서 충주까지 배로 여행한 <상유주행록(上遊舟行錄)> 등 주목할 만한글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