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말에서 명나라 중기에 걸쳐 소주(蘇州) 일대에는 시문과 서화를 일상화한 문인들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늘어난 인구와 발달한 경제를 바탕으로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기가 높았다. 그들은 산수화를 즐겨 그리고 자신역시 산수화의 한 장면처럼 자족하며 살았다. 그들이 그린 그림은 자신들이살고 있는 지역이나 동경하는 세상을 그린 것도 있으며 역사상의 인물이 살던 곳이나 누군가의 호를 형상화한 것도 있다. 이들은 왕유, 도연명, 백거이,소식 등 대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거나 학문과 문학이 뛰어나고 사상이 자유로우며 풍류를 아는 인물을 선호하였다. 이들 중에 사마광(司馬光,1019~1086)도 있다. 사마광은 북송 시기 신법의 실행을 두고 왕안석과 크게 대립하여 득의와 실세가 서로 엇갈린 인물로 북송 당쟁사의 원류가 되었다. 사마광은 한 때 왕안석과의 정쟁에서 밀려 한직을 자원하여 낙양으로 온 뒤에 독락원을 지어 마음을 달래며 자치통감을 편찬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주자를 위시한 성리학자의 호평을 받아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군자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그가 경영한 독락원의 모습은 「독락원기(獨樂園記)」와 「독락원7영(獨樂園七詠)」에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하는 「독락원기」는 전체의일부에 지나지 않아 독락원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명사대가 중 한 사람인 구영(仇英 : 약 1502~1552)1은 나머지 3사람에 비해 문벌과 학식이 크게 뒤떨어지지만 발군의 그림 실력과 노력으로 직업화가의 정교함과 문 인화가의 사기(士氣)를 함께 갖추어 감상자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미국 클리브랜드 미술관 소장 <독락원도(獨樂園圖)>가 바로 그러한 작품으로사마광과 소식의 시문, 구영의 그림, 문징명의 글씨가 어우러져 당시 소주문인들이 도달한 서화 예술의 고도를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지난 12월 초 필자는 소주박물관에서 열린 오문화파(吳門畵派)의 마지막 전시 <십주고회(十洲高會)>2를 관람하다가 이 작품을 보고 큰 감동을느낀 나머지 이제 문징명이 쓴 사마광과 소동파의 글을 살펴보고 그림 속운치어린 누정들을 소개한다.
1. 구영의 독락원도
2. 사마광의 독락원기와 독락원7영
3.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독락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