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에는 “선사신조(宣賜宸藻)”로 시작하는 족자가소장되어 있다. 여기서 ‘신조(宸藻)’란 국왕의 문장을 말하므로, 국왕이 내려준 글이라는 뜻이다. 이 족자는 1782년(정조 6) 5월에 정조가 어릴 때 스승이자 최측근 신하였던 서명응(徐命膺, 1716∼87)의 문집을 읽은 후 그감회를 노래한 시이다. 서명응은 1780년(정조 4) 3월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정조가 국왕으로즉위하자 서명응․서명선(徐命善) 형제는 홍국영(洪國榮)과 대립했다. 홍국영과 서명선은 정조를 국왕으로 옹립할 때에는 협조했지만 이들의 정치적 성향에서는 차이가 많았다. 서명응은 1780년 홍국영이 정계에서 축출될때 함께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서명응은 영조 말년에 홍계능(洪啓能)과 가깝게 지내고 아들 서형수(徐瀅修)를 제자로 보냈다는비난을 받았다. 홍계능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야기한 나경언(羅景彥) 고변사건의 배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조는 1781년에 서명응이 만년까지 절개를 잘 지켰다는 의미에서 ‘보만(保晩)’이란 호를 지어주었고, 1782년에는 그 자손들이 편집한 문집을 읽고이를 기념하는 시를 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