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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겸재 정선, 한강을 재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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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예술과 인문, 풍류가 파도처럼 반짝이는 놀이와 여유의 공간이었다. 그곳에 세워졌던 수많은 누정들이 시와 선유, 문화누림의 중심이었음이이를 증거한다. 조선왕조시대 서울지역에 해당하는 한강인 경강(京江) 유역에만 해도 누정이 75개 이상이 세워져 있었다 한다. 광나루와 동호일대 18개, 용산 앞의 남호일대 9개, 마포 앞 서호일대 35개, 노량진 일대 월파정을 비롯한 3개, 양천(지금의 강서) 일대에 10개나 있었다. 이들 지역에 양수리남한강변이나 여주까지 이르는 강변에 있었을 정자까지 포함시킨다면 100여개는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성종 8년(1477)에는 대신들이 한강가에 사치스런 정자만 짓고 나라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여 그 후로는 한강변의 정자를 짓지 못하게 상소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18세기 영조 35년(1759)에 편찬된《여지도서》에는 전국 누정의 수가 1,023개소로 기록되어 있으며, 19세기 말에 편찬된《읍지》는 누정이 1,883개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누정 모두가 시문과 문화 즐기기, 자연회귀염원의터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풍류, 문학, 예술교류의 센터가 되었음을부인키 어렵다. 그만큼 한강은 문화의 중심지 자리에 있었고, 오늘의 번쇄 한 도시 풍경을 넘어 정신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이 한강을 본격적으로 그린 이가 진경산수화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1676~1759)으로 그는 숙종, 경종, 영조시대를 살았다. 물론 겸재 이전에도 한강을 그린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계회도’정도의 것이었다. 계회도란“관료들의 계모임을 일정한 틀에 맞추어 그린 것”으로, 한강 풍경은 그 뒷 배경으로 들어설 따름이었다. 지금까지 현전하는 한강명승도로는 <독서당계회도> 두 점인데, 하나는1531년 작으로 추정되며 다른 하나는 1570년경의 작품으로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 그림의 하단 근경 밑에는 거기 참석한 인물들의 벼슬, 생년, 자, 과거급제, 본관, 거주지, 부친의 내력까지 적혀있다. 중경에는 한강풍경이, 원경에는 삼각산, 북한산들의 산세가 그 이름들까지 명기되어 있다.그림으로는 남아있지 않지만 조선태조실록 ‘조선초기팔경도’에 정도전이쓴 8경시가 있는데 이중 ‘서강조박’(西江漕泊)이 포함되어있다. ‘서강조박’은 서강에 정박해있는 배들의 정경을 그린 것으로 한강은 조선 초부터 8경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얘기이다. 세종실록에도 활쏘기에서 우수한 성적을거둔 권람에게 <한강도>를 한 폭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더하여 한강유람 은 당시 중국 사신들에게 큰 인기 코스였고 그들은 한강유람도 그림까지 갖기를 원했다는 기록이 중종, 문종실록에서 보여준다. 한강은 자연감상과 시정의 터일 뿐 아니라 외교의 터도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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