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대전지역에는 회덕민란(1862)·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는 흐름과 위정척사·의병운동으로 대표되는 성리학 질서의 흐름이 존재했다. 두 세력 간의 치열한 대립과 갈등의 모순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임오군란 이후 개화에 반대하여 낙향한 전직 관료들을 중심으로 위정척사사상이 더욱 강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1905년을 전후로 대전에서도 개화사상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노론을 대표하는 은진 송씨의 본거지였던 회덕에서 계몽운동에 동참하려는 문중 인사들이 등장한 것이다. 1905년경에 霽月堂文僖公派 송씨 문중인사들 주도하에 외남면 대동리에 설립된 대아학교가 그 예이다. 비록 이를 반대하던 세력들에 의해 1906년 12월경에 학교가 폐교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변화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한편으로 1906년 3월 고종황제의 ‘興學詔勅’으로 지방관들에 의해 근대학교 설립이 주도되었지만, 여전히 지역의 주도세력이었던 인사들의 관심 부족과 열악한 재정 문제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더욱이 1906년 1월 송병선의 자결순국도 영향을 미쳤다. 그 뒤 1907년 7월 고종황제 퇴위 이후 국망의 위기 속에서 1908년 1월 대아학교복설이 추진되었다. 발기인 26명에 450여 원의 기부금이 모일 정도로 다양한 세력이 이에 동참하였다. 특히 위정척사사상을 견지하던 문중의 인사들도 참여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움직임은 1907년 5월 국채보상운동에서도 나타나 사상을 초월하여 많은 세력이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회덕보다 상대적으로 위정척사사상이 약했던 진잠에서의 근대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개 군수가 이를 주도하고 유지들이 동참하는 양상을 띠었다. 학교운영은 民戶들로부터 義助金을 받아 충당하거나 郡會를 조직하여 자치적으로 이뤄졌다. 더욱이 전통시대의 교육기관이었던 향교를 근대학교로 전환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국채보상운동에서도 드러나 회덕보다는 더 많은 지역민들이 이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지역의 계몽운동은 충남의 타 지역과 단순 비교할 때 학교 수, 주도세력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참여자 및 금액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 위정척사사상이 여전히 강고하여 계몽운동이 저변으로 확대하지 못했고 이를 추진할 주체세력 또한 약했다. 둘째, 계몽운동을 뒷받침할 적정의 재정을 마련하지 못한 한계점도 내포하고 있었다.
In the late Choseon Dynasty, There were two types of thought flow in Daejeon Area. The one was a flow of ethnocentric order represented by the flow of the Hoedeok revolt and the Donghak peasant movement and the other was a Confucianism represented by ideology the Wijeongcheoksa Thought(衛正斥邪思想) and Righteous army movement. The contradictions of conflict and conflict between the two forces continued into modern times. The tendency of the former bureaucrats who had fallen in opposition to the flowering after the imperial military uprising was further strengthened. However, around 1905, a movement began to accept theory of enlightenment in Daejeon too. In the family of Eunjin Song clan of Hoedeok, who had long represented conservatives, some people appeared to join the enlightenment movement. An example is the Daeah School, founded in Daedong-ri, Oenam-myeon(外南面) in 1905 by people led Eunjin Song clan. Although it was closed down in December 1906 by forces opposing the establishment of the school, it was a change in the flow of the times. On the other hand, according to the order of Emperor Gojong in March 1906, the provincial governors led the establishment of modern schools, but they failed to make fruit due to lack of interest and poor financial problems. After that, around July 1907, after the exit of Emperor Gojong, in the crisis of defeat, in January 1908 the re-establishment of the Daeah school was promoted. It is noteworthy that peoples of the Eunjin Song clan who insisted on the conservative ideology at that time participated in the school establishment. This movement also appeared in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in the May 1907. On the other hand, the movement to establish a modern school was actively developed in Jinjam, where the conservative ideology was relatively weaker than the Hoedeok province. Generally, County guard led the establishment of the school and the maintainers participated in it. Furthermore, there was a move to transform the Hyanggyo into modern school here. In these social atmospheres, more local residents than Hoedeok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Nonetheless, the enlightenment movement in the Daejeon region is simply compared with other parts of Chungcheongnam-do, there is a big difference between the number of modern schools and the leaders and the participants of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There are two reasons for this. First, because the ideology of the ruling party was still strong, the enlightenment movement did not expand to the ground, and the main forces to pursue it were also weak. Second, there was a limit to the lack of sufficient financial resources to promote the enlightenment movement in the Daejeon area.
1. 머리말
2. 계몽운동 전후 회덕·진잠 지역의 역사적 배경
3. 대전지역의 계몽운동 전개 양상
4.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