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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換局을 넘어 蕩平으로, 延礽君의 國王되기

Yeoning, The Crown Prince : The Struggle for survival and the formation of new political alliances

DOI : 10.29186/kjhh.2020.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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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란 권력을 향한 서로 다른 세력의 갈등과 화해의 기록일 것이다. 조선사 역시 이러한 다툼과 화해, 연대의 기록이다. 출생과 함께 換局과 黨爭의 중심에 놓였던 英祖의 일생은 상대의 존립을 인정하지 않는 노·소의 극한 갈등을 극복하려는 역사화해의 압축판이었다. 그의 왕위 계승 정통성 문제에서 출발한 당파의 대립은 환국과 獄事로 이어지며 대규모 희생자를 내고 즉위 후에도 충역시비로 인한 국정 운영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영조는 즉위와 함께 탕평을 선언하여 갈등 국면의 종식과 당파의 화해를 추진하였다. 영조가 내건 화해와 탕평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즉위 전 시기, 연잉군과 세제로 보낸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조가 즉위와 동시에 탕평을 주창할 수 있던 것은 세제시기 구상의 결과이므로, 이 글에서는 세제 연잉군의 경험과 정국 인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父王 肅宗의 반복적인 환국은 景宗과 延礽君 형제를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대척점에 놓았다. 丙申處分(1716) 이후 조정의 우세를 점한 노론은 경종을 견제하며, 대비와 연합하여 공공연히 연잉군을 擇君하여 建儲·代理를 추진하였다. 노론의 독선적 형태에 분노한 경종과 소론은 辛壬換局과 獄事를 통해 노론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잉군은 끊임없이 위협에 처했다.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며 건저의 정당성을 흔든 柳鳳輝의 상소, 대리청정 논란으로 불거진 不忠의 문제, 신축환국과 세제 시해 기도 사건 그리고 睦虎龍의 고변 등은 그의 세제 시기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연잉군은 세제 책봉 직후, 불거진 유봉휘의 상소에 자신을 한껏 낮추며 욕심 없음을 호소하는 반면 三宗血脈論을 내세워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대리청정 논란이 일자 여러 차례 간곡한 상소를 올려 孝를 표하면서도 경종의 병을 에둘러 표현하며 노론의 명분을 두둔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또한 환국 후, 노론이 축출된 상황에서 벌어진 시해 기도 사건을 처리하며 상황의 반전을 꾀하였다. 자신을 압박하는 金一鏡과 朴尙儉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孝의 실천과 학업이라는 세제의 본분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고 사위 시위를 벌이며 환관의 정치 개입을 공론화하였다. 이 사건은 세제가 노린 환국의 번복이라는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예기치 않은 소득을 안겼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영의정 趙泰耈와 시강원 궁료 宋寅明 등은 세제의 보호와 지지를 천명하였다. 세제는 이들과의 연대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노론의 퇴출로 보호막을 상실한 세제는 대척점에 있던 소론과 연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급진파 소론을 견제할 수 있었다. 이들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역모에 연류당한 세제의 보호에도 적극적이었다. 세제는 이들에게 신뢰를 표했으며 사건의 해결을 일임하였다. 노론의 실각과 급소의 위협은 오히려 세제에게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할 기회를 주었다. 이로써 연잉군은 양립 가능성을 상실한 노·소 대신 화해와 연대의 정치를 추진할 탕평파를 구상할 수 있었다.

To fully understand the main actor of any political upheavals, it is crucial for historians to examine the actor’s public and personal elements. For Yŏngjo (r.1774-1776), who spent more than half of his reign over his royal legitimacy, both elements are particularly essential to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his reign. The lingering legitimacy question originated from his appointment of a Crown Prince and Regent. The recurring “turn-overs” (hwanguk), which initially emerged from Sukjong era, deteriorated gravely following his appointment. The political clash was inevitable as Noron supported Yeoning while Soron supported Kyŏngjong. When Noron rushed to take over the throne by seeking to appoint Yeoning as Crown Prince, Kyŏngjong and Soron fought back by imprisoning Noron officials and enforcing a turn-over. In the process, the endangered Noron-endorsed Yeoning had to battle for his political and personal life. As the rival faction attempted to question the royal protocol of Yeoning’s investiture, he drew attention to his legitimacy by emphasizing his humble character and the royal lineage. When the controversy erupted over his role as Regent, he ustified his service as an act of filial piety by stressing his selflessness and Kyŏngjong’s poor health condition. After the purge of his supporting faction, he actively sought to engage in political affairs, although his acts may have violated his duty. The Crown Prince even put his position at stake to proclaim that turn-overs were bound to happen due to the collusion between his rival faction and eunuchs. While he failed to accomplish his goal, he secured crucial supports among the officials who would later help him be cleared of treason charges. From the beginning of his investiture, Yeoning formed a political faction, comprised mainly of officials from the Crown Prince Tutorial Office. Yeoning’s experiences in incessant turn-overs led him to cultivate political skills and form new political alliances with those officials who would eventually play key roles in promoting the Policy of Impartiality after Yŏngjo’s accession to the throne.

Ⅰ. 머리말

Ⅱ. 노론의 擇君과 延礽君의 불만

Ⅲ. 朴尙儉 사건과 蕩平派의 前兆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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