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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과 생산체제의 변화

A Study on Rooftile Manufacturing Techniques and Production System in Baek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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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백제 기와 제작기술의 변화가 생산체제의 변화와 어떻게 연동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작성하였다. 2장에서는 백제의 기와 제작기술을 도성의 변천에 따라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백제는 한성기인 3세기 말부터 기와를 제작·사용한다. 4세기 전엽 이후에는 낙랑이나 고구려, 중국 남북조 국가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양의 수막새와 다양한 기술이 적용된 평기와가 제작된다. 475년 웅진 천도 이후 백제의 기와제작 기술은 한성기와 큰 차이를 보인다. 왕궁인 공산성이나 사원인 대통사에서 출토된 기와들은 평기와의 크기나 제작기술, 수막새 문양이나 접합기술에서 규칙성이 강조된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대통사 創建瓦들은 사비기 기와 제작기술의 바탕이 되며, 신라 흥륜사나 일본 飛鳥寺 창건와 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538년 사비 천도 이후 왕궁이나 관청, 사원에는 다수의 기와집이 건립된다. 사비기 왕궁과 사원에서 사용한 기와들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관북리 일대 왕궁 구역의 수막새들은 특정 문양을 고수하면서 장기간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능산리사지·군수리사지·왕흥사지 등 사원에서 사용한 창건기 기와들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문양을 가진 창건와가 새롭게 제작·사용되었다. 3장에서는 기와 제작기술의 변화가 관영 수공업 생산체제와 어떤 관련을 갖는지를 분석하였다. 백제 한성기의 초기 기와는 제작 기술이나 도구에서 토기와 큰 차이가 없었다. 토기 공인과 기와 공인의 분화는 평기와 제작에서 모골통 사용이 본격화되고 수막새 제작이 시작되는 4세기 전엽 이후, 특히 낙랑계 기와 제작기술의 유입이 계기가 되었다. 그 뒤 東晉에서 불교가 전래된 후 佛寺 건립이 이루어지면서 기와 생산체제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웅진기 기와 생산체제와 관련해서는 정동리 가마터와 대통사 관련 자료들이 주목된다. 정동리 가마터는 국가에서 운영하던 瓦陶兼業窯였다. 그곳에서 생산된 벽돌이 공급된 송산리 6호분 출토 명문전을 보면, 이 무렵에는 벽돌이나 기와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공인 집단이 조직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주 반죽동 출토 기와들은 백제의 기와 생산이 ‘大通寺’ 건립을 계기로 큰 변화가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백제는 대통사라는 본격적인 가람을 조영하면서 官營의 기와 생산체제를 성립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사비기에는 기와를 제작하는 전문 기술자를 瓦博士로 삼았다. 이들은 사원 조영이나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功德部나 司空部 등 중앙 행정 관서에 소속된 기술계 관료였다. 부여 정암리와 청양 왕진리 가마터는 공방의 집중성과 지속성, 瓦窯의 형태, 제품의 규격성, 소비의 한정성 등에서 官窯의 조건에 잘 부합한다. 飛鳥寺의 창건과 관련된 일본의 문헌기록이나 가마터 발굴 성과는 백제가 588년 이전에 이미 중앙 행정 조직 내에 기와의 需要供給을 관리하는 官窯體制가 성립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This study sought to examine the technical development of rooftile manufacturing in Baekje (18 BCE-660) in connection with that of the production system. In the main discussion of the study found in the second chapter, the development achieved in the rooftile manufacturing techniques by Baekje artisans is divided into three stages according to the change of its capital. It was in the late 3rd century - when Baekje had its capital in Hanseong - that this ancient Korean kingdom began to produce ceramic rooftiles. In the early 4th century, Baekje artisans started producing roofend tiles decorated with a variety of ornamental motifs and flat tiles using various new techniques developed under the influence of Nangnang (or Lolang), Goguryeo, and Chinese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The rooftile manufacturing techniques achieved after Baekje moved its capital to Ungjin in 475 became widely different from those of the earlier period. The rooftiles from this period, unearthed at the sites of Gongsanseong, fortified the royal palace of Baekje in this period; Daetongsa Temple features outstanding regularity in size, manufacturing techniques, and decorative designs. The tiles of the original Daetongsa Temple, made under the influence of the Chinese Southern Dynasties, laid the foundation for the tiles of Baekje in the Sabi period (538-660) and had a great effect on the rooftiles of Heungnyunsa Temple in Silla and Asuka-dera in Japan. After moving its royal capital to Sabi in 538, Baekje built many tile-roofed buildings for government agencies and Buddhist temples as well as the royal palace. Archaeological discoveries show that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the tiles used for palaces and those for temples. These also suggest that the convex roofend tiles found at the royal palace site around Gwanbuk-ri were decorated with the same specific motif for an extended period of time, whereas the tiles unearthed at the Neungsan-ri, Gunsu-ri, and Wangheungsa temples sites continued to be decorated with new motifs. In the third chapter, the discussion was focused on how the changes that occurred in the tile-making techniques affected the craftwork production system operated by the Baekje government. The early Baekje tiles made during the Hanseong period have no significant difference with pottery in terms of manufacturing techniques and tools. It was during the early 4th century when advanced manufacturing techniques were introduced from Nangnang - which led to the extensive use of tile makers (mogoltong) and the production of decorative roofend tiles (sumaksae) - that a division began to be made between tile makers and potters. The arrival of Buddhism from Eastern Jin is generally believed to have resulted in the establishment of Buddhist temples and a significant change in the production of rooftiles. As for the production of ceramic rooftiles in Baekje during the Ungjin period, the relics related to the Jeongdong-ri kiln site and Daetongs Temple provide important archaeological clues. The Jeongdong-ri kiln site was run by the government of Baekje for the production of both rooftiles and pottery. According to the inscribed tiles excavated at Songsan-ri Tomb No. 6, which was built with the bricks produced at the Jeongdong-ri kiln, Baekje seemed to have had two groups of artisans each specializing in bricks and rooftiles. The rooftiles unearthed in Banjuk-dong, Gongju show that a major change had occurred in the production of rooftiles with the establishment of Daetongsa Temple. It is highly likely that Baekje was able to establish a government-led tile production system through the construction of a full-scale Buddhist temple such as Daetongsa. Baekje during the Sabi period honored master tile makers as rooftile specialists (Wabaksa).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기와 제작기술의 발전과 변화 양상

Ⅲ. 기와 생산체제의 성립과 전개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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