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 국민정부의 미국 편승 전략과 한국의 독립 문제, 1942-1945
Kuomintang’s Bandwagon Strategy with the U.S. and Korean Independence Problem, 1942-1945
-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 사회과학논집
- 제49권 제1호
- : KCI등재
- 2018.05
- 36 - 52 (17 pages)
본 연구는 1942년부터 1945년 사이 새로운 지역 질서가 형성되는 전후 시점(postwar juncture)에서 장개석 국민 정부가 미국 편승 전략을 취하게 된 국제정치적인 원인과 이러한 전략이 한국의 독립 문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임시 정부 승인 문제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주요 사례로 분석한다. 최근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장개석 일기와 국민당 외교 문서를 기초로 카이로 회담 당시 국민 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기존 연구들과 추가 접근 가능한 1차 사료들에 기초하여, 본 연구는 한반도의 독립문제는 동아시아 지역 동학의 주요 행위자인 중국과 전세계적 동학의 주요 행위자인 미국에 의해 국제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장개석의 한반도에 대한 야욕에도 불구하고 탈식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승함으로써 최소한의 지역 강대국 지위를 확보하고자 했던 장개석 정부의 판단이 한반도의 독립 문제가 국제적으로 카이로 회담에서 승인되는 데 기여했다. 국공 내전으로 인해 국내적 통일조차 이루기 버거웠던 장개석 정부의 입장에서 1895년 이전 조공 체제로의 복구는 요원한 현실이었기에 최소한 한반도를 독립시켜 다시 “영향권 진공 지역”으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In order to understand how Kuomintang’s Korean policy influenced Korea’s independence problem between 1942 and 1945, this paper analyzes the international political causes behind Chiang Kai-shek government’s bandwagon strategy with the U.S. at the postwar juncture and how this strategy affected Korea’s independence problem with the case study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approval issue and the Korean clause issue in the Cairo Declaration. Recently, historians have conducted various researches on those issues by discovering and utilizing Chiang Kai-shek’s diary and Kuomintang’s diplomatic documents. Based on these existing studies with the addition of accessible primary archives, this study argues that the Korean independence problem had been internationalized by China, who had been the rising regional power at that time, and the U.S., an ascending hegemon in global dynamics. Despite the Chiang Kai-shek’s ambition toward Korean peninsula, Kuomintang government’s determination to secure its regional power by bandwagoning with the U.S.-centered anticolonial world order contributed to the international 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t the Cairo Conference in 1943. To the Kuomintang who had been hardly achieving national unification due to the ongoing civil war, the restoration of the tribute system prior to 1895 was almost impossible to reach; hence, Chiang Kai-shek government tried to transform the Korean peninsula into an “influence-vacuum area” at least.
I. 문제 제기
II. 전후 동아시아 지역 질서 형성의 동학(動學)
III. 임시정부 승인 문제
IV. 카이로 회담에서의 한국의 독립 문제
V.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