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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중국 관내지역 한인 청년의 저항과 정주

상해와 북경 망명자 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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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일제강점기 중국 관내지역을 중심으로 한인망명자들의 한인커뮤니티 형성과 청년망명자 활동, 망명지에서의 사회문화적 정주환경의 변화를 다루었다. 정주환경의 차이는 한인 커뮤니티의 형성과 변화양상의 이중성 이중성과 복합성을 보여줬다. 망명지 선택은 해당 지역에 대한 정보나 평판, 이동상의 편의, 혹은 일제의 압박이나 감시에서 이탈하려는 여러 동기들에 의해 작동되었다. 한인 커뮤니티는 개인적 친분, 물질적 자원, 학업적 요인, 직업적 동기와 연관되며, 이주과정에서 친분을 기반으로 한 경로의존성도 나타난다. 항일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진 망명자집단은 초기에는 지역과 이념과 같은 요인에 영향을 받았으나, 중국대륙이 일제강점상태에 직면하고, 한인규모의 확대에 따라 커뮤니티 형태는 각각 항일과 친일적 인구집단의 출현으로 변형되는 모습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분열양상을 보였다. 풍부한 인적 기반을 가진 만주지방의 사정과 달리 북경과 상해는 한인인구가 소수로, 학우회, 청년단, 종교, 사상, 교민단 위주의 커뮤니티가 발달한다. 상해와 북경은 무장투쟁보다는 항일담론을 둘러싼 갈등과 분열을 보였으며, 항일방략을 둘러싼 지도부간의 입장차이로 균열한다. 두 지역은 정주환경의 차이만큼이나 역할의 차이를 보여준다. 북경은 만주와 화중을 연결하는 화북 중심지로, 적극적 무장투쟁론을 강조하는 성향의 항일운동가들이 많았다. 반면 상해는 임시정부, 학교, 교회, 교민단을 기초로 커뮤니티가 형성되고, 국내의 대중문화계 인물도 망명하여, 항일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양쪽 모두 현지인의 지지와 협력이 한인커뮤니티와 청년정주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동했다. 망명과정은 현지사회 속에서 동화되면서도, 한인의 고유성을 지지받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인은 주류사회의 지식인과 교류하며 사회적 지위와 명망을 확보했다. 그러나 관내지역 한인 커뮤니티는 1930년대 이후 기존 양상과 다른 변형성을 보인다. 일제침략으로 강점된 관내지역의 한인들은 만주지방의 한인들과 달리, 적극적 저항방식을 추구할 수 없었고, 일본인과 혼합된 잡거지를 구성했고, 경제적, 상업적 정주를 추구했다. 이와 달리 반점령지 한인들은 항일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막대한 희생을 감수한다. 이 같은 일제말기의 재중항일활동은 당대의 한인들에게 친일과 항일의 갈림길에서 극심한 균열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종래의 인적기반의 증가가 민족단위 커뮤니티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와 달리 일제점령지공간에서 한인집단의 인구 급증은 효과적인 한인커뮤니티의 강화가 아니라, 항일기반을 제약하는 감시와 통제하는 식민주의 기제가 더 지배적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This study aims to review the changes in settlement environment in accordance with Korean youths’ movement in Chin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 lot of Korean young students, intellectuals, and free laborers from all over Korea were flown in the representative movement points for Korean people such as Beijing and Shanghai. Korean communities in China showed huge differences in accordance with the settlement environment. In case of Shanghai, Korean people tried to build up the community by emphasizing the cooperation with local residents based on the decolonization The youth and the intellectual exiles provided a basis for forming the overseas Korean society, there were limitations to solve all sorts of problems of Korean people. Many Korean people were employed in the status of the jobless and stowaway. Thus, they experienced conflicts related to job, housing, children, education, and ethnic marriage. The appearance of Shanghai interim government in 1919 largely contributed to the improvement of Korean people’s social status. Even though the French concession authority did not carry forward the active Korean protection policies, it established the nonintervention principle regarding the interim government’s activities, which promoted the development of Korean communities. In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Korean people residing were degraded into scapegoats for the extensive compulsory mobilization. During this time, various Korea-Japan organizations were degenerated into pro-Japanese groups. Individuals had to go through all sorts of discrimination and control. During this process, many Korean youths were arrested, sacrificed, or served time in prison by the Japanese authority. In the results, the resistance of overseas Korean youths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was not simply originated from the ethnic expression, which was not unrelated to the intellectual tradition aiming for the ethnic cooperation in the international and East Asian Levels.

Ⅰ. 문제제기

Ⅱ. 한인의 중국망명과 관내지구 한인망명지의 부상

Ⅲ. 상해지방으로의 한인의 망명과 문화활동

Ⅳ. 북경지방 한인의 유입과 항일운동 거점의 변화

Ⅴ. 일본점령기 북경과 상해 한인의 위축과 저항

Ⅵ.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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