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소련에서 북한유학생들이 집단 망명한 사건에 대해서는 그동안 언론 보도를중심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왔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증언과 기억, 그리고 개인적인기록들에만 의존 한 것이어서,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구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북한유학생 허웅배의 당시 서한은 이 사건에 대한 보다 실증적인 연구의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서한과 그의 회고록을 교차 확인하면서 한편으로 관계자들의 증언들을 통해 당시 사건의 역사적 정치적함의를 짚어 본 점이 이 논문의 의의다.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일성은 이 사건 이후로 소련 간섭 없이 자국 내 내부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의 공인된 역사에서 종파투쟁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김일성 권력 강화 과정은 이 시기를 전후로 본격화 되었다고 판단된다. 둘째, 이 사건은북한 인민들에 대한 행동과 사상 통제를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셋째, 이로부터 북한 사회는 더욱 더 외부세계와 단절되는 폐쇄사회로의 성격이 강화된다. 넷째, 1958년 북한유학생들의 망명사건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서 일어 난 북한 최초의 정치적 집단 망명이었다. 다섯 째, 당시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북한의 정치적 상황에 비추어 지금도 유효하다. 여섯째, 당시 소련의 “해빙” 상황은 동구 여러 나라들에 영향을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당시 모택동의 중국이나 김일성의 북한에서는 이러한 해빙기의 분위기가 곧 사라진 것은 추후 연구과제다.
It was in 1958 that 10 North Korean students studying in Moscow, did political asylum. After Khrushchev’s secret speech before a closed plenum of the 20th Congress of the CPSU in 1956, many things had been changed in the Socialist states including among North Korean political elites especially called “Younanpa” and North Korean students in Moscow, then. Ho Ungbae’s memoirs and letter to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gave the light on the 1950’s North Korean students’ asylum, which was first political asylum to USSR from N. Korea.
Ⅰ. 서론
Ⅱ. 정치적 배경
Ⅲ. 허웅배에 대해서
Ⅳ. 진행 과정
Ⅴ. 정치적 함의
Ⅵ.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