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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16세기 중엽 조선 성리학의 변화추이와 송당학파의 대응

박운・김취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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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엽 조선 성리학은 道學이라는 실천적 운동에서 理學이라는 세련된 이론화 과정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당시 『朱子書節要』와 『宋季元明理學通錄』 등을 내놓은 이황과 그의 학파는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고 있었는데, 이는 의도치 않게 송당학파 외부에 강력한 원심력으로 작용하면서 송당학파의 쇠퇴를 촉발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한 송당학파에서 보인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변화하는 학계의 조류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면서 이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학문 방법을 전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사적 변화에 동의는 하지만 그와 별도로 학파의 정통성을 부식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반응 가운데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朴雲이다. 그는 당시 조선 성리학의 발전 방향에서 보면 송당학파 내에서 가장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소학』과 『대학』・『중용』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학파 내부의 분위기와 달리 그는 주자학의 핵심적 이론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물론이고 이를 『擊蒙編』과 『紫陽心學至論』 등의 결과물로 산출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이 작품들은 박운의 저서는 아니고, 박운이 성리학의 핵심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주목한 언설을 선별하여 모아놓은 편찬서이다. 더구나 성리학의 핵심 이론이나 개념에 대한 관심과 의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의 구성은 완성도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박운으로부터 이 작품들에 대한 질정을 요청받고 준열한 비판을 가했던 이황은 송당학파의 학문 수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은 金就文이다. 그는 名義에 투철했던 관료였을 뿐 아니라, 화려한 文章보다 학문으로서 義理를 중시한 학자였다. 그의 학문은 四書에 주목하는 단계를 넘어 朱子書를 중심으로 하는 주자 성리학 일반으로 확장되어가는 당시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취문의 학문과 사상을 이른바 道學에서 理學으로 진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醇正性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순도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즉, 그는 정통 도학의 후예이자 송당학파의 핵심 인물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활동했다. 그가 金烏書院을 건립하고 김종직・정붕・박영을 합향하는 등 조선시대 도학의 계보를 확립하기 위해 보여준 일련의 시도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道學에서 理學으로 변화해 가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추이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In the mid-16th century, Joseon Neo-Confucianism was entering a sophisticated theoretical process called Lihak(理學) from a practical movement called Dohak(道學). Yi Hwang and his School led this trend, which unintentionally acted as a strong centrifugal force outside the Songdang School, triggering the decline of the school. The reaction shown by the Songdang School in the face of such a situation can be summarized in two main ways. One is to voluntarily embrace changing academic currents and shift the academic method to respond to them, and the other is to agree with ideological and historical changes, but strive to establish the legitimacy of the school separately. Among these two responses, Park Woon represents the former. He was the most progressive figure in the Songdang School in terms of the development of Neo-Confucianism in Joseon. Unlike the atmosphere within the school, which was still in the stages of Sohak(小學), Daehak(大學), and Joongyong(中庸), he was interested in the core theories of Zhu Xi s Neo-Confucianism and produced them as a result of Gyeokmongpyeon(擊蒙編) and Jayangsimhakjiron(紫陽心學至論). In a strict sense, however, these works were not written by Park Woon, but merely excerpts of sentences that he thought were important while studying Neo-Confucianism. Moreover, the contents of these books lacked a lot in terms of completeness. Yi Hwang, who was asked by Park Woon to review and revise the works, also questioned the academic level of the Songdang School. Among the responses of the Songdang School, Kim Chuimun represents the latter. He was not only a bureaucrat who was committed to principles and justifications, but also a scholar who valued philosophy as an academic rather than brilliant writing skills. Furthermore, he was involved in the academic trend of the time, exploring the theories of Neo-Confucianism centered on Zhu Xi s work. However, if we look at Kim s studies and ideas in terms of purity required in the process of advancing from Dohak to Lihak, it is true that he lacks purity. In other words, he worked with the identity of a descendant of orthodox Dohak and a key figure in Songdang School. A series of attempts he made to establish the pedigree of Dohak, including the establishment of Geumoseowon and having Kim Jong-jik, Jeong Boong, and Park Young perform ancestral rites here. However, these attempts could not resist the trend of Joseon Neo-Confucianism, which was changing from Dohak to Lihak.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도학의 맥과 송당학파

Ⅲ. 박운의 대응

Ⅳ. 김취문의 대응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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