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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壬辰倭亂期 豊臣政權의 權威

히데요시의 天皇·天子 활용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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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倭亂(壬辰戰爭)은 사건 발발 이래 조·일 관계를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 학자들은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최근에는 중국 학계에서도 본격적으로 임진왜란 연구에 뛰어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동아시아 국제전쟁’에서도, 오래 전부터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와 여러 학설이 존재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학술사도 상당 부분 축적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動因을 찾아내는 데 주목하였으며, 히데요시 정권을 다각화해서 살펴보는 데 기여하였다. 그 결과 현재는 한일을 막론하고 ‘협상가 히데요시’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또한 히데요시 치정의 일부로 평가해야 함에도, 임진왜란 연구는 히데요시 집권기의 유기적인 상황에서 다루기보다는, 임진왜란에 일본이 총력을 기울였다는 전제 하에 ‘임진왜란만을 분석대상에 놓고’ 출발하였다. 히데요시의 도해 계획도 마찬가지로 대개는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상황보고’의 일부로 다루어져 왔다. 본고에서는 히데요시가 자신의 권력을 보장받는 수단으로 조선 도해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밝히고자 한다. 히데요시의 조선 도해 계획은 皇胤設을 뛰어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이었지만, ‘태양의 아들[日輪の子] 히데요시’는 예기치 못했던 天皇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히데요시가 天皇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만큼, 그는 처음에는 마지못해 도해 연기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히데요시는 이 논리를 天皇이 자신의 도해에 반대하기 때문에 당장 시행하지는 않지만, 자신은 도해할 뜻이 계속 있다고 하여 天皇과 자신의 뜻을 차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天皇의 예려 활용은 조선 도해를 추진하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후 히데요시는 일본국왕 책봉을 계기로 다른 논법을 도입하였다. 그는 집권 초에 사용하던 天皇의 勅命과 叡慮에 기반했던 권위를 응용하여, 明 天子를 끌여들여 조선 도해를 가능하게 할 ‘예려’로 전환하려 했다. 결국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줄 수 있는 대상을 더 많이 만들어냈고, 그를 대내외 양면에서도 인정하게 하는 데까지도 성공하였다. 이에야스 역시 이러한 ‘새로운 권위’를 활용할 수 있는 책봉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명과 조선 모두 히데요시의 선례가 있었기에 이에야스의 책봉 요청을 묵살하였다. 결국 이에야스는 책봉을 포기하고 바쿠후 체제로 전환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론 이러한 히데요시의 논법은 일본 天皇이나 일본의 天下를 부정한 것도 아니고, 명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권위는 언제나 불안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자신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게 할 권위를 원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은 토요토미 정권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고 또한 변용하는 장으로 볼 수 있다

Since its outbreak, Imjin War(Hideyoshi’s Invasion) has become an essential event to examine on the Chosŏn-Japan relationship; many Korean and Japanese scholars have been discussing the event with great interest, with more full-fledged studies increasing from the Chinese Academia. Among the context of this ‘East Asian war’, many theory and discussions about the reason why Hideyoshi enforced invasion towards Chosŏn have been raised, also with meta-analysis of the existing researches. These studies mainly focused on investigating Hideyoshi’s motives for the war, thus contributing in the diversity in researching his regime. This led to the predominant image of Hideyoshi as a negotiator, both in Korea and Japan, relatively disregarding the organic flow of the regime and Imjin War as part of its political activity, and maintaining the focus only on the war itself. Hideyoshi’s plan to cross the sea towards the Korean peninsula has also been studied as part of war reports. This article aims to focus on this plan as Hideyoshi’s method for his regime, and how he utilized it to secure his authority. Hideyoshi’s plan to cross Chosŏn’s borders has its roots in his effort to claim that he is distantly linked to the Japanese Tennō as ‘Nichirin no Ko’(Son of the Sun), which inevitably contradicted the Tennō’s word. As Hideyoshi could not contradict him, he was unwillingly forced to postpone his plan. Hideyoshi, however, continued to claim that he has different thoughts with the Tennō, and that he is always willing to carry out his own. Using the authority based on Ming Tianzi’s ‘Order’, Hideyoshi later decided to claim that his plan has been approved by Ming’s Tianzi. Because this new strategy was proven to be successful, Tokugawa Ieyasu later also sought to do the same but was disregarded both by Chosŏn and Ming; this led to Ieyasu giving up on establishing a tributary system with Ming and transitioning into Japan’s original Bakufu system. Hideyoshi’s new logic did not deny Tennō’s Japanese Imperial House nor his regine, and it was also not about being incorporated into the Ming-centered Chinese world order system. However, with his power always being instable, Hideyoshi sought for the authority which could support his regime’s stability. In this context, Imjin War can be studied as a stage that best reveals this characteristics and how they were transformed in the long term.

I. 머리말

II. 히데요시의 조선 도해와 天皇의 叡慮

III. 히데요시의 日本國王 冊封과 天子의 ‘勅命’

IV.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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