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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樂齋의 救國 抗爭과 講學 活動

A study of a save-the-nation drive s strife and an exposition activity of NakJae(樂齋)

DOI : 10.17293/dbkcls.2008..34.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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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齋 徐思遠은 명종 5년인 1550년 6월 4일, 경상북도 星州 八莒縣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行甫이며, 호는 樂齋 · 顧諟子이다. 졸년은 1615년[66세]이다. 徐思遠은 임진왜란기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학문 연마와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낙재는 蔡應麟와 全慶昌에게 수학하였으며, 그 학문적 연원은 퇴계에게 닿아 있다. 寒岡 鄭逑는 師弟보다는 師友로서의 성향이 강하다. 이러한 관계는 당시 지역의 宿儒인 東岡 金宇顒도 마찬가지이다. 낙재는 1584년[35세]부터 13번이나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다가 임진왜란 중인 1595년에 淸安 縣監으로 부임하여 4년간 재임하였다. 낙재는 임진왜란기에 향리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고 지방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군량을 모집 조달하고 명나라 사신을 접반하는 등 관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낙재가 강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580년[31세]부터이며, 강학을 한 주요 장소는 伊川精舍를 비롯하여 硏經書院․仙査齋였으며, 장기간에 걸쳐 강학의 규약이 이루어지고, 강학이 체계화되었다. 낙재의 문하에 다수의 사인들이 출입하였지만, 『樂齋徐先生門人錄』에 기록된 문인의 수는 총 55명이다. 낙재와 가장 절친했던 인물로는 旅軒 張顯光 · 槐軒 郭再謙 · 慕堂 孫處訥 등을 꼽을 수 있다. 낙재는 향리에서 명리를 추구하지 않았지만,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낙재는 퇴계 학파의 정통을 계승하였지만 율곡의 문집을 읽고 율곡 학파와도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또 퇴계학파의 주된 연구 분야인 성리학 연구를 충실하게 수행하였지만 교조적 학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함으로써 편협된 세계관을 넘어섰다. 이와 같은 개방적 학문 자세는 도서를 서로 빌려주는 지식의 유전을 활발하게 촉진하였다. 또 그의 예술적 취향은 그의 문학에 활력을 불어 넣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명사들과 교유하는 하나의 양상으로 기능하였다.

NakJae(樂齋) SeoSaWon(徐思遠) was born in the PalGeoHyeon(八莒縣), SeongJu(星州), GyeongSangBukDo in the 1550. His Ja(字) is HangBo(행보), Ho(號) is NakJae(樂齋) and GoSiJa(顧諟子), and he was killed in 1615. Centering around the time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NakJae(樂齋) unfold a save-the-nation drive in the YoungNam district, and the other he study the learning and evolve an exposition activity. NakJae(樂齋) is taught by ChaeYengLin(蔡應麟) and JeonGyeongChang(全慶昌), an academic origin get in touch with ToeGye. HanGang(寒岡) JeongGu(鄭逑) is not a teacher but a colleague. This aspect is applied to a relationship with DongGang(東岡) KimUhOng(金宇顒) who is a famous confucian in the Youngnam district in those days. NakJae(樂齋) was summoned 13times by the Royal court from 1584, he didn t answer the call. But in the time of Japanese invasion in Korea 1595, he leave for his new post as a ChungAnHyeonGam(淸安縣監) and hold office for four years. During the time of Japanese invasion of Korea, NakJae organize an army in the cause of justice in his hometown, and resisted by arms. After appointment to the post of local officer, he scrape provisions, provide them for the army, give an entertainment to the Ming-dynasty s envoys, and etc. He perform his duty as an officer. His exposition activity is begun in 1581, a seat of its is ICheonJeongSa(伊川精舍) · YeonGyeongSeoWon(硏經書院) · SeonSaJae(仙査齋). For a long time, an exposition activity s rule was made and was systematized. A great number of scholars visit under NakJae s instruction, and the number of his disciple which recorded in 「NakJaeeoSeonSaengMunYinLok(樂齋徐先生門人錄)」 are 55. His close friends are YeoHeun(旅軒) JangHeyonGwang(張顯光), GoeHeun(槐軒) GwakJaeGyeom(郭再謙), MoDang(慕堂) SonCheoNul(孫處訥), etc. NakJae didn t seek after fame and wealth, he associated with a celebrity in those days. NakJae succeed to the legitimacy of the school of ToeGye, he read a collection of YulGok s works, and briskly associate with the school of YulGok. He faithfully practice on a study of Sung-Confucianism which a main study field of the school of ToeGye. Unlike the doctrinaire confucian, he dip into the works of great authors and overcome the illiberal global outlook of the doctrinaire confucian. These frank learning attitude induce a vigorous transmission of knowledge. His taste in art not only put energy into his literary but also give support holding intercourse with a celebrity in those days.

1. 序論

2. 學問淵源과 官歷

3. 壬亂期의 救國抗爭 活動

4. 交遊 樣相

5. 講學 活動과 門人

6. 結論 - 樂齋 硏究의 方向性 提示를 겸하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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