琉璃廠은 오늘날 北京 和平門 지하철역 남쪽에서 200m 떨어진 지명이다. 유리창은 원래 원・명・청 시대에 궁중 기와를 굽던 곳이나 청나라 중엽 때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지식 문화의 산실로 바뀌었고, 오늘날에도 그 전통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조선 사신들은 연경(북경)에서 빈번히 유리창을 드나들면서 문물을 구입하거나 청조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18세기 말경에 조선 화원이 그린 『燕行圖』가 소장되어 있는데, 여기의 제13폭 화면이 유리창으로 비정하고 있다. 화면 속의 유리창은 전각이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으며, 거리에는 사람과 화물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화면은 1780년(건륭 45) 유리창이 대규모 화재로 소실된 이후에 호화스럽게 재건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오늘날 유리창 서사에는 많은 문헌들이 유통되고 있었고, 이 중에 극소수이나마 한국관련 문헌도 포함되어 있다. 청조 중엽부터 민국 시기까지 유리창서사에서 『東醫寶鑑』, 『灤陽錄』, 『燕臺再遊錄』, 『海東金石苑』, 『高麗國永樂好太王碑釋文纂考』, 「蘇定方平百濟碑」, 「劉仁願紀功碑」 등 한국관련 고문헌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한국 문화가 유리창을 통해 중국 문인으로 흘려 들어간 실체를 알 수 있다.
Liulichang was the place of baking roof tile for imperial court from Yuan(元) dynasty to Qing(淸) dynasty, attracted many scholars and became the cradle of knowledge in the middle of Qing dynasty. Even today continues the tradition. Joseon envoies to Beijing frequently visited Liulichang and associated with many Chinese scholars there. The Korean Christian Museum at Soongsil(崇實) University has The Painting of the Journey to Beijing(󰡔燕行圖ꡕ). The 13th scene describes Liulichang. The scene shows the picture of Liulichang that was reconstructed after destroying by a big fire broken out in 1780(the 45th year of Qianlong(乾隆) s reign). Today many documents are put into circulation in Liulichang s bookstores. Even though very few, there includes Korea-related documents. Korea-related documents and rubbed copies such as Dongi Bogam(󰡔東醫寶鑑ꡕ) were circulated among Liulichang s bookstores during the period of Republic China or before. We can grasp the truth of how Korean culture to flow into China through the materials.
1. 서론
2. 崇實大藏本『燕行圖』중 「琉璃廠」
3. 琉璃廠 書肆에 유통된 한국 관련 고문헌
4. 결론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