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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退溪의 「和陶集飮酒二十首」에 나타난陶淵明 수용 양상

Toegye s following the rhymes of Dojam s “Drinking Wine” poems: Compared with Sodongpa and Maewoldang

DOI : 10.17293/dbkcls.2010..4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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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詩史에서는 도연명을 흔히 田園詩人이라 일컫는다. 세속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전원으로의 은거를 선택한 도연명의 삶과 문학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에 의해 무수히 창작된 和陶詩가 그에 대한 尊慕와 崇仰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화도시가 본격적으로 창작된 것은, 중국에서는 蘇東坡에 이르러서이고 우리나라는 梅月堂 金時習에 의해서였다. 퇴계는 43세 때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할 계획을 세웠고 46세에는 고향 마을에 養眞菴이라는 암자를 지어 은거의 터전을 마련했다. &#65378;和陶飮酒二十首&#65379;는 퇴계가 한서암에 이사한 그해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연명을 수용하는 방식은 시인이 처한 시대 상황과 개인의 처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띤다. 그 중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소식, 김시습, 퇴계의 예에서 보듯이, 모두 도연명을 본받아 자신과 맞지 않는 세속과 거리를 두고 자연과 친화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飮酒>라는 詩題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술을 통해 세 시인 모두 天眞함을 발견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 세 사람의 和陶詩에 나타나는 차이점도 분명하다. 소식은 현실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탓에 벼슬을 버리고 도연명처럼 은거하리라는 결의를 여러 번 시에 표현했지만, 끝내 濟世安民하고자 하는 儒者로서의 자세를 견지한 채 세속에 대해 超然하지는 못했다. 김시습의 경우 宦路에서 두 번의 좌절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도연명의 탈속적인 자세를 닮으려는 노력은 하였지만, 그의 시에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守拙하는 것에 대한 자기 확신 내지는 자부심 같은 것이 강하게 배어 있다. 퇴계의 화도시에는 陶淵明, 朱子를 비롯한 앞선 시대의 賢哲 그리고 金蘭之交를 맺을 만한 知音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고, 아울러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일 뿐만 아니라 天道가 성취되는 공간으로서의 自然이 그려져 있다. 고향에 내려와 書院을 짓고 後學들과 講學을 하며 天理와 人性을 탐구하는 性理學者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Dojam(陶i潛) is known as a representative pastoral poet of China. Many poets of China and Korea have loved his poems and followed the rhymes of them. The contents of Hwadosi(和陶詩 following the rhymes of Dojam s poetry) are as various as conditions which each poet was faced with. But they also have something in common. In this paper, I payed attention to Sodongpa, Maewoldang, and Toegye. All of these three men tried to keep their distance from secular affairs and get close to nature. They wanted to live like Dojam. And they found innocent and pure humanity while they were drinking. However, there are some differences in these three poet s Hwadosi. Sodongpa said in his poems many times that, like Dojam, he would leave public office and retire to hermitage in the mountain. Because he was discontented with the political reality of the time. But he hoped to live as a Confucian who should save the world and relieve the people, so he could not be free from the world, secular affairs. Maewoldang failed to enter government service two times in his life, so he tried to rise above the world like Dojam. In his poems, however, we can read obviously his anger against the world which did not recognize him, and his pride which would help him maintain his integrity. Toegye, in his Hwadosi, expressed regret at the fact that he could not live with wise men such as Dojam and Juja in the same age, and that he could not meet a true friend. He took nature as a place to find peace and described nature as the place in which God fulfilled his way. He was a scholar of Neo-Confucianism, so he built a lecture hall and taught younger students after he went down into the country. Studying disposition of Providence and human nature constantly, he expressed illumination he found in his poems.

1. 緖論

2. 蘇軾, 金時習의 陶淵明 受容

3. 退溪의 和陶詩

4. 結語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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