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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후기 道山書院의 경제기반과 전답운영

Financial base and farmland management of Dosanseowon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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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경제는 다양한 재정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원이 18세기 이후 뚜렷한 증가추세를 보이지 못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매년 지출되는 경비가 증가 추세에 있었다는 점이다. 서원의 지출경비에는 일용경비를 비롯하여 독서유생의 접대비 등의 정기비용이 있었고, 이외에 문집발간, 부조, 서책구입, 전답매입, 잡물구입 등으로 지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18세기 중엽 이후 본격화되는 서원의 중수와 수리 등은 서원 자체재원으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다른 하나는 원노비, 원속, 소작료, 신공 등의 미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서원은 회수 불가능한 미봉은 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런 추세 속에 18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대부분의 서원이 수입과 지출의 불균형이 노정되면서 서원재정이 부실해져 갔다. 그리고 19세기 이후에는 각 서원마다 누적된 부채를 갚기 위해 토지를 파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원경제는 토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도선서원의 경우 조선후기 여타 서원의 재청운영 추이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1693년에 건립된 도산서원은 설립 초기 서원전과 서원촌을 중심으로 재정을 운영해가고 있었다. 서원 건립을 주도하고 있던 남인계 인사들은 탄방동의 전답을 확보하는 한편, 공주목으로부터 면세전 2결과 화전 5결을 획급받았다. 그리고 천내면을 서원촌으로 이속받고, 이곳으로부터 시탄을 공급받았다. 아울러 은진 강경포의 배 1척에 대한 수세권, 부조 등을 통해 재정원을 마련하였다. 그 중 핵심재정원은 역시 서원전이었다. 그러나 도산서원의 서원전은 19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18세기 후반 도산서원은 공주, 진잠, 회덕 등 3개 군현에 집중분포하고 있었다. 그 규모는 464두락을 초과하였고, 그곳에서 수취한 도조액은 175석 이상이었다. 그러나 1804년 도산서원사적비’ 건립를 건립하고, 이후 향사에 많은 재원이 소비되면서 지출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도산서원은 보유하고 있던 서원전을 지속적으로 방매했는데, 그 결과 100여년이 지난 19세기 후반 도산서원은 서원 부근 지역에만 70두락의 전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1. 머리말

2. 도산서원의 경제기반

3. 도산서원의 전답운영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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