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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후기 금산군 읍치(관아지)의 역사경관 고증연구

조선후기 및 일제강점기 자료의 비교 분석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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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구는 조선시대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에 약 330여 곳에 설치하였던 읍치 중 하나였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근현대 도시화로 그 역사도시적 경관을 완전히 상실하였던 금산군 읍치에 대해 고증하고자 하였으며, 그간 금산군읍치의 원형에 대한 도시적 차원의 고증연구가 부족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다.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조선후기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와 일제강점기 초기 제작된 『지적원도』를 상호 비교하여 그간 구전으로 일부 전해져 오던 금산군 읍치지 주요 시설들의 위치를 구체화하여 실제로 입지하였을 곳을 특정할 수 있었다는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적원도가 제작된 시기가 국권이 피탈된 지 최소 4년여가 지난상태에서 제작되어 그간 기존의 국공유지에 해당했던 읍치 내 국공유지 중 중요도가 낮은 필지들은 이미 민간에 불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일본인들이 지방으로 정착하기 위해 시도되었던 토지매매의 대상이 되어 일본인의 소유로 전환된 경우 등을 온전히 따져 분석하기에는 연구여건의 한계로 인해 더 깊이 있게 접근하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이다. 이러한 점은 향후 후속연구로 보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 연구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읍치 연구의 최대 한계점은 실제 도시로서 읍치를 다루기 위한 다양한 자료들이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 현실적으로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이번 연구에서도 조선후기의 자료를 도대로 건물들의 입지와 공간관계 동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얻었으나, 아쉽게도 건축물의 규모나 양식에 대한 부분은 전혀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자료의 부족은 근본적인 읍치연구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현재의 금산군은 조선시대 개의 고을, 즉 금산군과 진산현의 영역이 대체적으로 합쳐진 곳이다. 다시 말해 현 금산군의 역사적 전신으로서 금산군읍치가 위치했던 현재의 금산읍 아인리 지역 일대과 진산현 읍치가 위치했던 진산면 읍내리 지역일대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할 수 있다. 부족하지만, 전술한 글을 통해 금산군 읍치에 대해서는 부분적이지만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산현 읍치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다. 향후 금산군에서는 현 금산군의 역사적 전신으로서 금산군 읍치지와 진산현 읍치지에 대한 심화된 고증연구와 이를 어떻게 기념하고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철저하게 파괴된 많은 문화유산 중 관방시설, 특히 읍치와 같은 지방 통치시설은 각적인 훼손보다는 점진적인 훼손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역사도시로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과 연결된 읍치에 대한 고증연구는 그 대상이 분명하며 1900년대를 전후로 제작된 자료들을 토대로 연구할 경우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라 생각된다. 이에 더하여, 우리는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해오고 있다. 단순히 역사적 고증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다함께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노력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1. 서론

2. 조선시대 자료를 통해 본 금산군 읍치

3. 일제강점기 자료를 통해본 금산군 읍치

4. 금산군 읍치(관아지)의 역사경관 고찰

5.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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