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은 이정(灘隠 李霆, 1554~1626)은 조선시대 묵죽화의 대가로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종친 화가이다. 그의 묵죽화를 일컬어 윤신지(尹新之, 1582~1657)는 석양공자의 먹의 묘리는 천하에 오묘하여 중국인들도 한 폭이라도 얻으려 값에 한정을 두지 않았다 라고 했고, 권상하(權尚夏, 1641~1721)는 지금까지의 작자는 무수히 많으나, 오직 탄은 노인의 명성만이 드높고 아름답다. 灘翁의 묵죽은 천하에 뛰어나 일시에 그 가치는 높고 그림 한 장 얻기 어렵다 라며 최고의 평가를 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이정의 『삼정첩』과 5만원권 뒷면에 실린 그의 풍죽도를 보면 그의 높은 예술성이 한국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공주와 관련된 이정의 자료는 작품에 등장하는 공산, 월선정, 만매음에 주목했다. 그리고 월선정, 만매음 등이 위치를 이정의 호 탄은 과 결부하여 공주 탄천 일대로 비정했다. 이정이 구체적으로 공주로 이거하게 된 배경과 월선정 건립 이후 정착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임영대군과 관련되어 공주지역에 이미 연고가 있었음을 추적해보았다. 기록을 통해 이정이 이미 호서의 고택 을 소유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지만, 구체적인 시기나 배경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필자는 이미 공주에 전장을 가지고 있었던 공주의 전주이씨 덕천군의 영향으로 이미 공주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소 추정이 가미된 논의이기는 하지만, 막대한 재산 축적 배경에 계유정난에 희생된 김종서 등의 공주인물들의 토지가 몰수 되어 공신들에게 분급하는 과정을 주목한 것이다. 이정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된 바가 없고 종친화가로서 작품 이외에 주목할 만한 활동이 없다. 따라서 공주로서 이거와 정착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이정의 교유인물들은 모두 시서화에 뛰어난 16세기 당대최고의 문인사대부들이자 관료들이었다. 문예적 재질과 정치적 성향 등도 이정과 같은 노선에 있었다. 16세기와 17세기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그들은 이정의 묵죽화를 통해 심성을 치유하였다. 공주에서 이정의 활동은 매우 일상적이면서 소탈한 모습들이었다. 그는 공주와 인근 지역 사족들과 뱃놀이에 시를 나누는 등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문학적 공감대를 나눴다. 물론 여전히 이정의 공주 활동은 밝혀져야 할 것이 많지만, 앞으로 더 많은 자료발굴과 역사인물연구가 중요한 이유는 공주가 가진 잠재력을 발굴하는 작업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이다.
1. 머리말
2. 이정의 생애와 공주 관련성
3. 이정의 활동과 지역문화적 의미
4. 맺음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