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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충청병영계록』을 통해 본 19세기 전반 충청병사의 지방행정

The Administrative Operation of Chungcheong-Byeongsa as seen through thε “Chungcheong-Byeongyeonggyerok(忠淸兵營启録)” in the early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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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충청도의 지방군제는 속오법과 영장제를 적용한 5개 진영과 상당 · 안흥 2개의 산성 중심 체제로 정비되어갔다. 특히 효종 2년 (1651) 김육의 건의로 충청병영을 내륙 요충지인 청주목으로 이전한 후로는 전·후·좌·우영과 상당산성이 병영을 호위하는 안정적인 내륙방어시스템이 구축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충청병영은 무신란과 같은 반란군에 의해 병영이 침탈당하는 참사를 겪었으며, 19세기 이후로는 일상적인 조련과 부세징수 등에 관한 문서행정이 병사의 주요 업무가 되었다. 19세기 전반 충청병사는 가뭄이 든 읍의 조련을 면해주고 堤堰 수축역에 향군을 동원하도록 하였으며, 신병을 핑계로 금위영과 어영청의 상번군 점고를 우후에게 맡기는가 하면, 상번군을 정지시키고 停番錢을 바치도록 하는 중앙군문의 요청을 각읍에 충실히 지위하였다. 도내 각 읍에서 매년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虎患에 대해서는 각진의 영장으로 하여금 토포사를 겸하게 하여, 해읍 수령과 함께 악호를 잡도록 신칙하는, 일관된 조치를 취하였다. 다만, 도내 이양선의 출몰과 표류민의 문정, 호송에 있어서는 수군첨사와 해읍 수령의 보고를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탐문하여 외국의 정보를 탐문하는 한편, 표류일로부터 호송이 끝날 때까지 처리과정을 자세하게 정리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는 19세기 이양선의 출몰과 같은 사회적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으나, 전통적인 방어시스템과 보고체계만으로 변화를 유인하는 데에는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었다.

1. 머리말

2. 17~18세기 충청병영의 운영 양상

3. 19세기 전반 충청병사의 업무 실태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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