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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번역] 三韓疆域考와 百濟慰禮城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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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左右吉은 일본 기후현[岐阜縣] 미노카모시[美濃加茂市] 출신으로, 1873년 태어났다. 1891년 와세다 대학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를 졸업한 이후 白鳥庫吉의 지도를 받았다. 1908년 南滿洲鐵道株式會社에서 석민지 경영을 목표로 한 만선사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滿鲜歷史地理調查部를 설치하면서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津田左右吉이 白鳥庫吉의 권유를 받아 집필한 책이 『朝鲜歷史地理』이다. 『충청학과 충청문화』의 이번 호에서 소개할 자료는 『조선역사지리』 1권 중에서도 ‘三韓疆域考’와 ‘百濟慰禮城考’이다. 津田은 ‘三韓疆域考’에서 고대사회 강역의 구획과 분기에 자연지리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는 전제 하에 삼한에 대한 역사와 그 안에서 백제의 강역을 기술하였다.津田은 대방군이 한강 유역에 위치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마한의 강역을 안성과 평택·직산·진천 일대를 경계로 하여 금강 및 그 지류를 포함하는 것으로 인석하고 있다. 주지하듯 津田은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연구』에서 근초고왕 대 이전 『三國史記』 기록을 부정하였다. 하지만 그 실체까지는 부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百濟慰禮城考’에서는 『三國志』 韓傳에 기록된 濟國이 百濟의 전신임을 염두에 두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에 처음 부여씨가 자리한 곳은 마한의 강역 중에서도 북쪽에 해당하여 한강 유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붙어 근초고왕 대 이후 韓語였던 慰禮城(남한산)이 漢式化 되어 漢水로 명명되었고, 개로왕 대까지 두 명칭이 함께 사용되었다고 보았다. 즉 津田은 세종 11년(1429) 이래 『三國遺事』에 근거하여 백제 첫 도읍지를 직산으로 본 ‘위례성=직산설’은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두 논고를 종합하여 보면, 초기 백제의 강역을 한강과 금강 사이의 어디쯤에서 찾아야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안정복과 정약용 이후로 백제 초기의 북계를 대통강 이남(황해도 평산, 猪灘)이나 예성강 유역으로 보고 있는 것과 인식이 다르다. 또한 지금 학계에서 마한의 영역을 경기·충청·전라도 일대로 비정하여 한성 백제 초기 영역을 한강 유역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과도 견해를 달리한다. 이렇듯 津田의 학설은 현재 크게 지지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津田의 인식과 논증 과정은 백제의 기원과 그 영역 범위를 고찰하는 데 연구사와 연구방법론의 측면에서 다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三韓疆域考

2. 百濟慰禮城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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