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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명품와(銘文瓦)를 통해 본 백령산성

Baekryeongsanseong seen through roof tiles with in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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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백령산성에서 출토된 명문와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명문와의 내용과 성격, 그리고 백령산성의 역사성을 파악하고자 작성되었다. 백령산성에서는 다양한 성격의 명문와가 출토되어 기와의 제작시기와 공급관계쁜만 아니라 산성의 축조 및 사용 시기, 축성 매경 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학술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명문와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그 성격을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丙’자명 인장와는 기와 제작과정에서 검증이나 인증의 표식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간지명 명문와를 통해서는 기와의 제작시기와 제작지를 파악할 수 있다. 간지 ‘丙辰’·‘丁巳’·‘戊午’는 사비기 정국상황을 고려해 볼 때 위덕왕 43년(596)·44년(597).45년(598)으로 비정할 수 있다. ‘栗岘’과 ‘耳淳辛’은 복수의 지역명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기와 생산에 참여했던 지역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上阝’명 인각와는 감독자의 출신이나 검수를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上水瓦作......’명 인각와는 나노성 이문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제작한 기와의 수를 기록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율현과 이순신은 나노성의 예하 촌락으로 역역에 동원되어 기와를 제작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명문와 이외에도 묵서 목판, 목곽고 등을 통해 백령산성 축조에 중앙에서 공인의 파견 등 일정한 지원과 관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국가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국경지대에 대한 축성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백령산성의 축조 배경은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가 패하면서 신라의 영향력이 금산의 일부지역에 미치는 과정에서 신라의 침략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금산은 백제시대 진잉을군과 황등야산군 소속의 진동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나노성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그 명칭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행정단위의 성(현)이었는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노성에서 기와를 제작하여 백령산성에 공급한 것으로 보아 일정한 행정단위였다고 볼 수 있으며, 율현과 이순신은 나노성 예하의 촌락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1. 머리말

2. 백령산성 출토 명문와 검토

3. 명문와의성격

4. 백령산성의 역사성

5.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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