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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의병장 李康秊 檄文類의 가치와 의미

A Study on the Value and Meaning of the Righteous Army Leader Lee Gangnyeon s War Manifestos

DOI : 10.17293/dbkcls.2021..8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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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전쟁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武力이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지휘자의 지적 능력을 중시하였다. 인적·물적 자원의 召募에 士類의 협조는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士類를 설득하는 주요 수단은 여전히 文筆이었다. 이강년은 무인 출신으로서 다른 의병장보다 탁월한 전투력과 武事 운영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문필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한말 의병장 가운데 가장 많은 16편의 격문류를 저술하였다. 격문류가 지어진 시기를 본다면, 「通告文」이 1907년 7월 6일에 지어졌다고 부기되어 있으니, 기록상으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글이다. 그리고 「檄告各道列邑文」이 7월 13일에, 「召檄」이 1907년 7월에 지어졌다고 부기되어 있다. 따라서 「再檄告文」·「檄告文」·「討倭檄文」도 동일한 시기에 지어졌을 개연성이 있다. 이들 글은 창의의 명분을 천명하고 군사와 물자 모집을 호소한 전형적 격문이다. 그리고 이강년은 1907년 중양절인 9월 9일에 「檄伊藤博文文」·「曉告宣諭委員文」·「曉喩一進會文」·「士卒誓戒文」 4편을 지었다. 그 중 「檄伊藤博文文」·「曉告宣諭委員文」·「曉喩一進會文」은 각각 한국 침탈의 원흉인 이등박문 討檄, 의병 와해 공작을 한 宣諭委員 효유, 일본의 앞잡이 一進會 효유를 목적으로 쓴 글이다. 글의 성격상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통고문인 「通告各國領事館文」도 대체로 이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의병 전쟁이 본격화된 시기에는 민간에서 인력과 물자 징발로 인해 발생하는 의병의 범법 행위를 단속하기 위해 민간인들에게 양해와 협조를 구하는 글이 지어졌으니, 「通告蓬坪士民文」·「示史內面執綱及各洞頭尊」·「示永東各坊曲頭尊」과 의병들을 경계·단속하는 「揭示」가 1907년 연말인 12월 25일부터 이강년이 체포되기 직전인 1908년 8월까지 작성된 격문류이다. 그리고 「告訣八域同志士友」는 이강년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한 날인 1908년 9월 19일에 지었다. 이처럼 이강년의 격문류 16편은 불과 1년 남짓한 시기에 지어졌으며, 召募·聲討·通告·曉喩·諒解·警戒 등 용도도 다양하다. 이강년은 1896년에 유인석 의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던 시기와 달리 1907년의 거병기에는 스스로 군사를 모으고 운용하는 등 지휘관으로 막중한 책무를 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강년이 이 시기에 다양한 격문류를 지었다는 것은 그가 의병장으로서 여러 가지 문제에 당면하고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현실을 보여준다. 그의 격문류가 갖는 특징으로, 용도가 다양하며, 상황에 맞혀 기민하게 작성되었으며, 적절한 형식과 구성·수사가 구사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이강년의 격문류를 분석해 보면, 그가 유인석의 학문적·문학적 맥락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인물이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의병 전쟁이 무력뿐 아니라 학문·문화적 수단도 강구되었다는 점에서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

Although the most required capability for the righteous army, of course, was force, intellectual powers of a leader was also considered to be very essential. The cooperation of the aristocracy(yangban) was highly important in gathering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and persuading such aristocracy relied mainly on pen and ink. Lee Gangnyeon, as a military man, distinguished himself by his superior combat power and military operational capability to other leaders of the righteous armies. But besides that, his writing skill was even as outstanding as those capabilities, and he wrote as many as sixteen war manifestos, which was the largest number of works among the righteous army leaders in the late Korean Empire period. As for the time of writing, the record shows 「Tonggomun(通告文)」 was written in July 6, 1907 and that is regarded as his very first writing. According to the record, 「Gyeokgogakdoyeoleupmun(檄告各道列邑文)」 was written in July 13, and [Sogyeok(召檄)」 was in July, 1907. This implies the possibility that 「Jaegyeokgomun(再檄告文)」·「Gyeokgomun(檄告文)」·「Towaegyeokmun(討倭檄文)」 could be also written in the same period. These are categorized as typical war manifestos that states why to raise an righteous army and appeals for gathering the army and supplies. On the ninth day of the ninth lunar month - September 9, 1907, Lee Gangnyeon this time wrote four manifestos - 「Gyeoki- deungbakmunmun(檄伊藤博文文)」, 「Hyogoseonyuwiwonmun(曉告宣諭委員文)」, 「Hyoyuiljinhoemun(曉喩一進會文)」, and 「Sajolseogyeomun(士卒誓戒文)」. 「Gyeoki- deungbakmunmun(檄伊藤博文文)」, 「Hyogoseonyuwiwonmun(曉告宣諭委員文)」, and 「Hyoyuiljinhoemun(曉喩一進會文)」 were written to criticize Ideungbak- mun(Ito Hirobumi) who was the chief instigator of Japanese invasion, to persuade Seonyuwiwon(宣諭委員) who sabotaged the righteous army, and to persuade Iljinhoe(一進會) that acted as the Japanese informant respectively. Considering the nature of the writing, the written notice to be sent to consulates of each country was also written at around this time. As the righteous army s wars began to accelerate, the writings to ask for civilians understanding and cooperation were made to clamp down on the righteous army s malfeasance that could occur in the process of requisitioning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from civilians; 「Tonggobongpyeongsaminmun(通告蓬坪士民文)」 and 「Siyeongdonggakbanggokduzon(示永東各坊曲頭尊)」, and 「Post(揭示)」 to caution and clamp down on the righteous army are the war manifestos written during the period from December 25, 1907 to August, 1908, right before he was arrested. 「Gogyeolpalyeokdongjisawoo(告訣八域同志士友)」 was written on September 19, 1908 - the day he was executed at Seodaemun Prison. Like this, his sixteen war manifestos were written only in about a year, and those have different purposes, such as to gather, criticize, notify, persuade, excuse, and alert. Unlike the period when Lee Gangnyeon acted as the leader of the Yu Inseok s righteous army troop in 1896, he had a heavy responsibility in 1907, the army-raising period, as he had to raise and manage the army on his own. The fact that he had wrote various war manifestos in this period indicates that he had to deal with a lot of problems by himself as the righteous army leader. His war manifestos features various purposes, agile writing skill for different situations, and proper formats with appropriate composition and rhetorical device. The analysis of Lee Gangnyeon s war manifestos show that he s the most faithful successor of Yu Inseok s academic and literary context. And this has the significant value and meaning since it proves that the Korean righteous army wars involved not only a military force, but also an academic and cultural mean.

1. 서론

2. 이강년 檄文類의 위상

3. 이등박문을 저격한 檄文

4. 국제사회의 협조를 구하는 通告文

5. 친일 분자에 대한 曉喩文

6.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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