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에서 여헌학파의 학파적 좌표
The school coordinates of the Yeoheon school in Joseon Neo-Confucianism
-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민족문화논총
- 민족문화논총 제79집
- : KCI등재
- 2021.12
- 889 - 920 (32 pages)
鄭夢周-吉再-金叔滋-金宗直-金宏弼에서 鄭鵬-朴英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맥을 이었던 송당학파는 16세기 초 詞章學의 풍조에서 벗어나 소학은 물론 대학과 중용을 중시하면서 인간 심성의 내면적 근원을 찾기 위해 經學에 치중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학의 심오한 이론을 이해 하였을 뿐 아니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특히 이황과 그의 학파는 이러한 흐름을 선도하고 있었다. 이는 의도치 않게 송당학파 외부에 강력한 원심력으로 작용하면서 송당학파의 쇠퇴를 촉진했다. 송당학파의 본거지였던 선산지역은 16세기 후반부터 장현광의 등장과 함께 학문적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면서 점차 旅軒學派의 거점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해 갔다. 장현광은 ‘不由師承論’이 제기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뚜렷한 사승관계 없이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일구었다. 장현광과 여헌학파는 善山 지역의 선현들을 존모하면서 송당학파로 상징되는 도학의 맥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였고, 동시에 선산지역에 유입되어 있던 퇴계학의 전통 역시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道學과 理學의 전통을 통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여헌학은 당시 영남지역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지만, 장현광 사후에 그의 이론은 퇴계학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장현광의 철학이론에서 가장 주목 받는 개념이 經緯說이다. 하지만 理氣의 관계를 經緯로 설명하는 그의 독창적 이론은 이황의 이론보다 이이의 이론에 가깝다는 이유로 퇴계학파로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제기된 비판이 여헌학파 내부를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장경우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不由師承論’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까지 장현광의 학파적 독립성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The Songdang School continued its Dohak(道學) from Jeong Mong-ju, Gil Jae, Kim Suk-ja, Kim Jong-jik, Kim goeng-pil to Jeong Bung, Pak Young in the early 16th century. This school focused on studying the scriptures of studying abroad, such as Daehak(大學) and Jungyong(中庸), which find human inner sources, breaking away from the academic trend of beautifying writing(詞章學). However, in the mid-16th century, Joseon s Neo-Confucianism not only understood the profound theory of Zu-xi’s philosophy but also reached the level of critical review. In particular, Yi Hwang and his school were leading this trend. The emergence of him and his school unintentionally acted as a powerful centrifugal force outside the Songdang school, promoting the decline of the Songdang school. The Seonsan area, which was the home of the Songdang School, has become the base of the Yeoheon School since the late 16th century with the emergence of Jang Hyeon-gwang. Jang Hyun-gwang built his own academic world without learning from a specific teacher. He and his school actively inherited the genealogy of Dohak symbolized by the Songdang School, respecting the excellent scholars who worked in this area. At the same time, they also positively accepted the tradition of Toegyeology that had been introduced into this area. As such, the Yeoheon School had its own influence in the Yeongnam region at the time, but after the death of Jang Hyeon-gwang, his theory became the subject of criticism from Toegye School. As is widely known, the concept that attracts the most attention in his philosophical theory is the theory of Gyeong-Wi (經緯說). However, his original theory was fiercely criticized by Toegye School for being closer to Yi Yi s theory than Yi Hwang s. However, it was difficult to persuade the Yeoheon School of criticism from outside. As a result, His disciples, including Jang Kyung-woo, strongly argued that Jang Hyun-gwang did not learn from anyone, (不由師承論) and tried to maintain the independence of Jang Hyun-gwang and Yeoheon School.
Ⅰ. 머리말
Ⅱ. 조선 성리학의 변화 추이와 송당학파
Ⅲ. 여헌학파의 송당학파 계승 의식
Ⅳ. 여헌학에 대한 퇴계학파의 비판
Ⅴ. 장경우의 여헌학파 수호와 계승
Ⅵ.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