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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전기 ‘발해인’의 사회적 동향

Social Currents of Balhae Descendants in Early Joseon: A Study on Hyeobgye Tae clan in Namweon

DOI : 10.17788/dbhc.2022..198.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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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가장 현달한 대집성의 후손들은 고려 왕실의 정치적 변동기에 화(禍)를 입고, 세거지를 개경(開京)에서 옥천(沃川)으로, 다시 남원(南原)으로 이주(移住)를 거듭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기왕의 연구에서는 협계태씨가 몰락했다고 보기도 하였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협계태씨(陜溪太氏)의 남원 입향조는 대영재(大永財)로 추정되고, 입향 시점은 14세기 전반기로 추정된다. 이들 가계의 중흥 노력은 남원으로 이거후에도 계속되었고, 이거 4세대인 (대영재의 증손) 태응진(太應辰)대에 이르러 상당한 사회, 경제적 재력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태응진은 협계태씨의 중흥조라 불릴 만하다. 태응진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식들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차남 태석균(太石筠)만 제외하면 나머지 자식들은 모두 가계의 배경이 분명한 인사의 자식들과 혼인을 성사시켰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혼사가 가능했던 것은 태응진의 증조 대영재때부터 지속하여온 선대의 노력과 태응진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The Hyeobgye Tae House prospered in the 13th century Goryeo, thanks to the political career of Dae Jib-seong, who was one of the most successful Balhae figures during the Goryeo period. Yet with the fall of Dae Jib-seong, the House itself took a hit and was forced to leave the Gaegyeong capital. First they moved to Okcheon, and later relocated to Namweon, where they eventually rebuilt the House. The Head of the House who settled down in Namweon for the first time was Dae Yeong-jae, seemingly during the early half of the 14th century. The House continued to expand its economic profile and elevate its political and social status in Namweon. Tae Eung-jin, who was part of the fourth generation of the House since its entrance into Namweon, successfully renovated the House. He had two sons and two daughters, and with the exception of his second son, all the other three married sons and daughters of prominent houses, even including the royal family. An impressive array of marital relationships was made possible by the House’s reputation, and further solidified the House’s position in Namweon.

1. 머리말

2. 여말선초 협계태씨 가문의 남원 이주 배경과 시점

3. 조선초 태응진의 자녀들 및 혼인관계망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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