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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후보 학술저널

월남 이상재의 민족계몽운동과 조국사랑

月南 李商在의 民族啓蒙運動과 祖國사랑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는 1850년 11월 24일에 충청남도 한산군(현재 서천군)에서 태어났는데, 이 무렵은 철종(재위: 1850~1863)이 즉위하면서 제2차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될 때였다. 이로 말미암아 국왕(國王)의 권력과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국왕의 외척(外戚)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농락하고 있었다. 이로써,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삼정(三政)의 문란과 관리들의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다. 이러한 때에 월남은 죽천(竹泉) 박정양(朴定陽)과의 만남을 통해서 신사유람단 (紳士遊覽團)의 수행원으로, 주미공사관(駐美公使館)의 외교관으로서 나라에 봉사할 기회를 가졌다. 두 차례의 외국의 선진한 문물(文物)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던 것이 뒷날 사회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뒷받침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 월남은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설립하여 개화 지식인들과 뜻을 모아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통해서 민권운동(民權運動)을 펼치면서, 국정개혁(國政改革)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병합된 후에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쳤다. 1919년 3ㆍ1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민족교육(民族敎育)의 시급함을 깨닫고, 월남은 한규설(韓圭卨)ㆍ김성수(金性洙) 등과 손잡고 조선민립대학(朝鮮民立大學)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 때, 월남은 기성회(期成會)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에 부딛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월남이 그 다음으로 추진한 사업은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이었다. 이는 3ㆍ1 독립운동 이후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일제(日帝)에 의하여 회유 당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이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들로부터 사상적 (思想的)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이로써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하여 민족주의자들의 대동단결이 필요하였는데, 이로써 1927년 2월 신간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이 때, 월남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그 해 3월 29일 77세를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큰 꿈을 접고 말았다

Wolnam Lee Sang-jae was born on November 24, 1850 in Hansan-gun(now Seocheon-gun), Chungcheongnam-do, around this time when King Cheoljong(reigned: 1850~1863) inaugurated, and the second power politics of Andong Kim began. It was time. As a result, the King’s authority were weakened, and the King’s outsiders were seizing power and ruining the state affairs. As a result, the disorder of Samjeong(三政), such as Jeonjeong(田政), Gunjeong(軍政), and Hwangok(還穀), and the discipline of the officials collapsed. At such times, Mr. Lee had an opportunity to serve the country as an attendant of the Shinsa Excursion Group(紳士遊覽團) and a diplomat to the US Corps through meeting with Park Jeong-yang. He had the opportunity to look back on advanced foreign culture twice, and it seems that he had support for his social activities in the later days. Since then, Mr. Lee established the Independent Association with Seo Jae-pil and others, gathering will with enlightenment intellectuals and promoting civil rights movements through the Manmin Association(萬民共同會), concentration on reforming state affairs. And, after the country was annexed to Japan in 1910, he dedicated his body and mind solely for the independence of his motherland. Afte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in 1919 ended in failure, he realized the urgency of national education, and Mr. Lee promoted the establishment of Chosun Civil University in partnership with Han Gyu-seol and Kim Seong-su. At this time, he took office as the chairman of the supporting association and promoted the establishment of a civil university, but ended in failure due to Japanese interference. The next project Mr. Lee pursued, was the founding of the Shinganhoe(新幹會). After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many patrots were apostatized by Japanese Imperialism, and nationalists were facing ideological challenges from socialists, and as a result, they felt a great sense of crisis in the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In order to overcome this situation, nationalist unity was necessary, which led to the founding of the Shinganhoe in February 1927. At this time, he was eleted president, but on March 29 of that year, he passed away at the age of 78, ending his big dream.

국문요약

Ⅰ. 글을 시작하며

Ⅱ. 月南의 出生과 서울生活

Ⅲ. 美國生活과 主權外交

Ⅳ. 獨立協會의 활동과 民權運動

Ⅴ. 民立大學設立運動과 敎育救國

Ⅵ. 新幹會의 창립과 民族啓蒙

Ⅶ. 글을 맺으며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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