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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일본(日本) 불탑(佛塔)의 전개(展開)와 구조적(構造的) 특징(特徵)

(韓),중(中)의 새로운 발견(發見)과 비교(比較)를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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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와 한국과 중국에서 실시된 불교사찰 유적에 대한 적극적인 발굴조사와 눈부신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고대 일본의 伽藍配置 형식과 목탑의 전개, 그리고 목탑 심초석의 설치 형식과 사리 봉안 형식의 변천을 동아시적으로 비교하여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7세기 전반까지 일본에서는 飛鳥寺 이외의 가람배치 형식은 1탑 1금당식이 기본이었으며, 이것은 남북조~당, 백제, 古신라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당이 성립된 7세기 중엽이 되면 호국을 목적으로 9층 목탑을 갖춘 대규모의 국립 사찰을 세우려는 기운이 고대 동아시아에 확대되었다. 또한 百濟大寺의 法隆寺式을 계기로 일본 독자의 가람배치 형식도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7세기 후엽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중국식 도성인 藤原京의 左·右京을 수호할 목적으로 통일신라에서 도입한 雙塔式 가람배치의 국립 사찰인 本藥師寺와 大官大寺가 조영되었다. 이러한 도시 계획은 奈良시대 平城京에 조영된 藥師寺와 大安寺에도 계승되었으나, 탑은 점차 중심 가람 밖에 건립되었다. 더욱이 平安시대에 密敎가 도입되자, 탑 내부는 大日如來에 비견된 心柱 주위에 불상을 안치하여 曼도邏 세계를 표현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는 末法思想이 유행하여 서방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금당에 대응하여 탑에 藥師如來像을 안치하여 瑠璃光淨土를 표출시키는 사찰도 등장하여 탑의 佛殿化가 진행되었다. 탑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 각국의 독자적인 변용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탑의 심초석 설치 형식과 사리 봉안 형식에 대해서는 북제 業城에 조영된 두 사찰의 탑에서 心柱를 떠받치는 반지하식 심초석과 그 아래에 사리 봉안 장치가 개별적으로 설치된 상황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은 동일한 상황이 백제 웅진기와 사비기 초기에 확인될지의 여부는 향후 중요한 연구과제이다. 사비기에 조영된 陵山裏寺址 탑(567년)에서 사리 봉안용 石函이 지하식 심초석 상면으로 이동하였고, 王興寺 탑(577년)에서는 사리 봉안용 석함의 역할을 한 방형의 사리공이 지하식 심초석 상면에 고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지하식 심초석 상면에서 심주가 놓일 위치에 방형의 사리공을 뚫은 형식이 일본의 飛鳥寺에 건립된 탑(593년)에 전파되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7세기 전·중엽에 사리공이 없는 심초석이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에도 동일한 형태가 軍守裏寺址 이외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중국에서는 사리 봉안을 위한 最外 장치가 석함, 소형 塼室, 대형 전실(소위 地宮) 순으로 변천하였고, 7세기 말에는 묘실형 地宮이 등장하여 후대까지 天宮과 함께 존속하였다. 地宮은 한반도와 일본에는 전파되지 않았지만, 탑의 지하식 심초석의 지상화를 촉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상식 심초석은 백제에서는 王宮裏 유적에서 한때 중국식 도성을 조영하려고 했던 武王 단계에 반지하식을 거치지 않고 출현했으며, 일본에서는 百濟大寺가 조영될 때(645년 경)에 도입되었다. 일본에서는 지하식 심초석이 7세기 말까지 반지하식 및 지상식과 혼재하는 독자적인 양상이 전개되었다. 奈良시대에는 탑의 심초석에 사리공을 뚫지 않고 불사리를 탑의 가장 높은 곳에 봉안하거나 불사리를 대신하여 경전을 탑에 봉안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중국과는 달리 불사리를 탑의 지하나 탑신에 봉안하는 행위가 점차 쇠퇴하여 탑에 付隨하지 않는 형식으로 신봉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압도적으로 목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奈良시대에 중국의 塼塔을 모방한 모전탑이 단지 3건립되었다. 백제 彌勒寺의 동서탑(639년)은 한반도에서 목탑을 모방한 최초의 석탑으로써 이러한 사례는 일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9세기 전엽에 건립된 德壹의 묘석탑에서 유일하게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From the beginning of the 21st century, there has been aggressive excavation and investigation on the remains of a Buddhist temple in Korea and China and thereby have been some fresh and new discoveries. These findings made it possible to deeply understand the structure of temple compound and wooden pagodas, and the transition of the placement styles of the central foundation stone of wooden pagodas and the dedication styles of reliquaries during ancient Japan in comparison with Ancient East Asia. Except for Asuka Temple, one pagoda for a main building of a temple was a basic style of the temple compound in Japan until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which reflects the similar situation during the time of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Tang dynasty, Baekje, and ancient Shilla.. In the mid-7th century when Tang dynasty was formed, the will of constructing a large scaled national Buddhist temple to protect their own country, including a nine-story wooden pagoda, spreaded through all over Ancient East Asia. In addition, Horyu-Ji style of the big Buddhist temple of Baekje paved the way to creating Japan``s unique style of temple compound for the first time. When Japan was defeated in the Battle of Baekchoengang in the late 7th century, the national temples of original Yakushiji and Daikandaiji with twin pagoda styled-temple compound introduced from Unified Silla were built to guard the right and left sides of Fujiwara-ky?, a Chinese style castle town. This style of city planning had continued to Yakushiji and Daian-ji of Heijokyo during the Nara period, but pagodas were gradually constructed outside of the center of a temple. Moreover, with the introduction of esoteric Buddhism in the Heian era, statues of the Buddha were enshrined around the central pillar of a pagoda compared to the Mahavairocana, and the world of mandala was expressed. From the late 11th century, when the idea of ending Dharma became prevailed, there appeared several temples where Medicine Buddha was laid in a pagoda and the thought of Ruriko Pure Land was manifested in response to Kondo representing the western paradise. Accordingly, the style of pagodas suggests each country``s unique and exclusive change in Ancient East Asia. Next, let``s turn to the building styles of the central foundation stone of the pagodas and dedication styles of reliquaries. The central pillars of the pagodas in the two temples built in Ye city of the Northern Qi dynasty were supported with semiunderground-type central foundation stones under which each Buddhist reliquary was enshrined. To identify whether the same situation could be found in Woongjin and early Sabi period of Baekje Dynasty or not is our important further task. The stone case to enshrine sarira found in Neungsanri temple site of the Sabi period had moved to the top side of underground-type central foundation stones(567) and a square-shaped sarira container in Wangheungsa temple was laid on the top side of the foundation stones, which was the first construction method in Ancient East. Furthermore, the method of penetrating a hole to put a square-shaped sarira container in the position of a central pillar must have affected the pagodas in Asuka temple of Japan(593). Given that there remained lots of central foundation stones without sarira containers in the early-mid 7th century of Japan, there are many chances that the same way might exist besides Gunsuri temple site in Baekjae. Meanwhile, in China, outermost devices to enshrine sarira underwent changes from stone cases to small brick rooms finally to large ones according to the shape of underground rooms for reliquaries of a pagoda. In the end of the 7th century, burial chamber typed-underground rooms started to appear and existed along with terrestrial rooms for a long time. The terrestrial room for reliquaries of a pagoda wasn``t transferred to Korea and Japan, but it seems to have expedited the construction of the room on the ground.

I. 머리말

II. 고대 일본의 伽藍配置 형식과 木搭의 전개

III. 고대 일본 목탑 心礎石의 전개와 구조적 특징

IV. 고대 일본의 模㙛搭과 石搭

V.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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