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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근세 일본의 재해사자와 사원

1657년의 대화재와 에코인(回向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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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근래 점점 주목을 받고 있는 재해 연구사 흐름 속에서 근세 일본 재해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서 ‘재해사자의 처리와 위령’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사례로 살펴보는 것이 1657년의 메이레키 대화재이다. 메이레키 대화재는 에도 시가지의 60%를 태웠고 이후 에도 도시 구조를 크게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재해사자의 문제는 ‘10만’이라는 숫자가 제시되었을 뿐 대량의 신원 불명 사자를 누가 어떻게 처리했고 매장했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죽은 이들을 어떻게 위령하고 기억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본 연구는 막부의 기록 등 당시 상황을 기록한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4대 쇼군 이에쓰나의 보좌역 역할을 하고 있던 호시나 마사유키가 재해사자의 처리에 깊게 관여했음을 밝히며 히닌(非人)들에게 사자의 운반과 매장을 담당케 했음을 지적했다. 재해사자들의 집단매장지로 선택된 곳은 당시 에도의 변두리 지역인 우시지마였는데 이 집단매장지에 막부는 ‘에코인’이라는 사원을 세워 재해사자를 위령토록 했다. 재해사자의 집단매장지에 위령을 위해 탄생한 이 사원의 처음의 명칭은 ‘쇼슈산 무엔지 에코인(諸宗山無緣寺廻向院)’이었다. 이 명칭과 초기 기록의 불명확함 때문에 에코인은 처음에 여러 불교 종파의 승려들이 참가하는 위령 의례가 이루어지는 초종파적인 사원으로 인식되었고 에도 시대, 근대, 현대를 거쳐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인식이 남아있다. 하지만 당시 사원신축과정과 위령 의례의 모습, 이후 정토종 사원으로 기록되고 산호가 ‘고쿠호잔(國豊山)’으로 변경된 점을 보건대 에코인은 처음부터 정토종의 사원으로 건립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오히려 처음의 사원 명칭은 ‘여러 종파(諸宗)에 속한 신원 불명 사자 즉 무연(無緣)의 재해사자가 극락왕생하기를 비는(回向) 사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에코인은 이후 에도 시대를 통해 메이레키 대화재의 재해사자를 위령하는 공간뿐만이 아니라 에도 시대의 지진, 기근, 화산분화의 재해사자의 위령의 공간, 이상사자와 동물의 위령공간으로까지 위령의 대상을 확대해나간다. 에코인이라는 사원은 막부의 명령과 비용부담에 의해 막부의 보리사의 주도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근세 일본의 대표적인 공공적 위령 공간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하나 ‘유일한 국가 위령 공간’이라는 시각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메이레키 대화재에 관해서는 독점적인 위령 공간으로서의 위치였지만 이후 에도 시대의 다른 재해사자 위령에서는 정토종을 대표하는 사원으로 다른 종파의 사원들과 함께 위령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This paper analyzes through a case study of disaster deaths of early modern Japan, how disaster victims were treated and memorialized. The Great Fire of Meireki began at Honmyōji in Edo on the eighteenth day of January in 1657. The fire lasted for three days and destroyed more than sixty percent of Edo, the capital of Tokugawa causing a hundred thousand deaths. Analyzing various types of public and private records about the fire revealed that Hoshina Masayuki, the adviser to the 4th shogun, had suggested to the Shogun and Rōjū to build a mass burial of the dead at a single site. Usizima was chosen as the site of the mass burial and the temple for the dead. The Jisha-bugyō, supervisor of shrines and temples, went to Zōzōji and ordered the abbot to build a temple for memorial services. This was called Shoshūsan Muenji Ekōin, where memorial services began to be held. One of the interpretations of the name Shoshūsan Muenji Ekōin was the Ekōin was built as a trans-sectarian temple and it became a branch temple of Zōzōji, the great main temple of Pure Land Buddhism. However, this study argues that Ekōin was originally a Pure land Buddhism temple, and the name of temple was derived from consideration for disaster victims. The name Shoshūsan Muenji Ekōin means that the place for commemorating unidentified disaster victims of various Buddhist sects. Thereafter, Ekōin became a representative temple for disaster victims of Edo period, for disasters such as the Great Eruption of Mount Asamayama in 1783, the Great fire of Bunka in 1806, and the Ansei Edo Earthquake in 1855. Throughout the history of Ekōin in early modern Japan, it appeared that Ekōin was the exclusive national memorial temple for disaster victims. However, it was not the only temple for disaster victims funded by nation but one of temples among various Buddhist sects in many disaster cases.

Ⅰ. 들어가며

Ⅱ. 화재의 발발과 대량사자의 발생

Ⅲ. 에코인의 건립과 명칭의 의미

Ⅳ. 화재 후의 에코인

Ⅴ. 산호 변경과 에코인의 근세적 위치

Ⅵ.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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