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마한백제문화 제39집.jpg
KCI등재 학술저널

미륵사지 출토 금동제 과대장식에 대한 고찰

A Study on Gilt Bronze Belt Ornaments from the Mireuksa Temple Site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金銅製銙帶裝飾은 2차 발굴조사시 南回廊址 西側 積土場에서 수습된 것으로 과대 장식판 1점만 남아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과대장식판에는 기존 고려시대 과대 장식문 양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공작을 탄 인물이 표현되어 있어 흥미롭다. 본고에서는 미륵사지 출토 과대금구 장식판을 고려시대 과대의 형식 및 제작 기법의 범주에서 살펴보고, 또 여기서만 보이는 독특한 도상에 대 해서도 고찰해보았다. 고려의 복식제도는 주변국가가 고려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변화하였는데, 관복의 구성인 과대는 이러한 복식 및 과대제도의 변화양상에 따라 살펴볼 수 있다. 『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 신라의 관복 제도를 이어받은 사실을 알 수 있으나, 이후 고려는 송대 복식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銙帶는 보통 띠고리인 교구, 띠꾸미개인 과판, 띠끝장식판인 대단금구와 허리를 두르는 부분인 鞓으로 네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고려시대 과대 중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으로는 안동 태사묘소장 과대가 대 표적이다. 미륵사지출토 금동제과대장식판은 오른쪽 변이 약간 둥글고 위아래 변이 오른쪽으로 갈수록 약 간 넓어지는 사다리꼴 형태이다. 출토된 부분은 대단금구이며 이러한 형태는 과대의 끝부분에 사용하는 帶端金具의 장식판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과대금구는 고부조의 타출로 만든 작품들이 많은데, 미륵사 지출토 과대금구는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다. 과대장식판 테두리 안쪽 중앙에는 공작을 타고 三山冠을 썼으며, 왼손에는 빛을 발하는 월광을 받쳐 들 고 있는 인물상을 나타냈다. 孔雀明王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공작명왕 부분은 저부조로 시문하였고 이 를 제외한 표면내부에 원형돌기문을 촘촘하게 장식하여 빈틈이 없으며, 매우 화려하게 꾸몄다. 공작명왕도 상은 현재 전하는 작례가 많지 않은 밀교적인 도상으로써 매우 귀중한 작례로 볼 수 있다. 공작명왕도상은 특히 밀교가 성행했던 일본에서는 다수 제작되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몇 점 안되지만 현존하는 작례와 간단한 기록, 그리고 『고려사』 기록에서 공작명왕도량을 열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공 작명왕에 대한 신앙이 분명 있었고, 이에 대한 조상이 다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와 같이 과대금구에도 장식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 銙帶제도의 기원과 전개

Ⅲ. 미륵사지 출토 金銅製銙帶裝飾의 제작기법

Ⅳ. 미륵사지 출토 金銅製銙帶裝飾의 도상적 특징

Ⅴ. 맺음말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