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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사학보 제45권.jpg
KCI등재 학술저널

이승휴의 자료 검토

‘村居自誡文’을 중심으로

본 논문은 제왕운기를 이해하기 위한 전 단계로 쓴 이승휴 관련 문헌자료에 대한 기초연구이다. 현재 한국 사학의 병폐인 문헌실증 사학과 배타적인 민족주의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이승휴(1200~1300) 관련 자료에 대해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의 문집인『동안거사집』과『고려사』열전의 이승휴 전기자료를 다루었다. 그의 문집은 5권 중 4권이 시집이고 1권이 산문인 잡저로 되어있다. 지금까지 이승휴 연구자들은 이 문집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잡저 중에 있는 촌거자계문에 대한연구가 아직 없다. 촌거자계문은 그가 57세에 파면되어 고향 삼척으로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던 시기에 작성되었다. 이는 자신이 경계할 바를 기록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을 분석해보면 23개 항목으로 되어 있고, 이는 자식들에게 준 교훈의 글이다. 그래서 이를 가훈으로 규정했다. 가족을 확인하기 위해 세 아들의 나이를 추정하였다. 가훈인 이 글에서는 자식들 간의 우애, 효도, 충성, 입신양명 등을 강조하기보다는 촌락생활에서 이웃과 잘지내기, 양보, 겸손, 청정, 마음 공부를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의 가훈과는 크게 다르다고 이해했다. 마지막 제23항은 결론에 해당한다. 여기서 모든 일에 겸손하고, 참을 것(忍)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가훈은 유교적 요소보다는 불교적 요소가 많이, 그리고 강하게 언급되었다. 또한 이승휴의 자료 중 문집 자료와 원부(1220~1287)의 묘지명 간에 충주목에서 만난 시기가 어긋난다. 본고에서는 사료의 외형적, 내용적 비판을 통해서 1241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승휴가 살았던 13세기는 고려 사회에 커다란 변혁기였고, 최대의 위기였다. 고려와 원나라의 대립관계는 고려 국왕인 원종의 세차례 출국으로 평화공존관계를 수립하였고,고려의 국민은 원과 고려의 2중국가 체제하에서 살았다. ‘원간섭기’로 칭하는 이 시대의 역사를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 측면의 양면에서 보아야 역사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논했다. 이 시대 국민의 생활은 더 안정적이었다. 고려사회는 유교와 불교, 도교, 민간 신앙이 자유롭게 행해져 다원적인 사회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불교를 올바로 인식하지 않고는 고려사회의 사회, 문화, 습속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음을 논했다. 이를 위해서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써진『고려사』에 대한 사료비판을 거쳐야 그 역사적 실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음을 논했다. 이승휴는 1273년 원 세조가 황태후와 태자를 책봉하는 식에 참석하여 축하하는 사신단의 한 사람으로 파견되었다. 이승휴는 사행 중에 지은 시를 그의 생전에 ‘빈왕록’으로 편집해 두었던 것이 그의 문집에 전한다. 이승휴의 뛰어난 시를 짓고,훌륭한 문장력으로 원나라 지도층을 감복시켜 고려사신단이 원 세조를 세번이나 접견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원나라 태후와 태자의 책봉을 축하하는 예식은 고려의 관례대로 하도록 하였음을 빈왕록은 전해주고 있다. 이때 이승휴는 원나라에 가있던 고려의 태자 충렬왕을 만나는 인연을 가졌다. 그 다음해 이승휴는 원종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사신으로 다시 원 나라에 가서 태자를 모시고 돌아왔다. 충렬왕 대에 그는 간관 직에 임용되어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충렬왕 주위에 포진한 측근 세력에 의해 6년 만에 파직되어 57세로 삼척에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는 10년간 1000 상자의 불경을 읽어 불교에 심취했다. 이때 그가 지은 촌거자계문과 제왕운기는 사상적으로 상호 깊 은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This thesis is a basic study on Yi Seung-hyu’s literary work ‘Chongeo-ja-gye-mun’(村居自誡文) a text about living in the countryside and being wary of oneself) as a pre-step to understand ‘Jewang ungi’(帝王 韻紀). In order to overcome the limitations of documentary empirical histories and exclusive nationalist histories, which are the ills of current Korean history, I critically reviewed historical materials related to Yi Seung-hyu(1224~1300). I dealt with his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Dong-an-geo-sa-jip’(動安居士集), and his biographical materials in ‘Goryeo History’(高麗史). His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consists of five books, four are poetry and one is prose. So far, researchers of Yi Seunghyu have not been able to actively utilize this collection of materials. Therefore, there has not been a study on ‘Chon-geo-ja-gye-mun’. ‘Chon-geo-ja-gye-mun’ was written while Yi Seung-hyu was expelled at the age of 57 and led a secluded life in Samcheok. It is stated in his preface that he records what he should be wary of, but if we analyze the specific contents, it consists of 23 items, and this is a text of a lesson he gave to his children. So it was defined as a family motto(家訓). To confirm the family, the ages of the three sons were estimated. In this text, the family motto, rather than emphasizing the friendship between children, filial piety, loyalty, and nurture, the emphasis was placed on getting along with neighbors in village life, yielding, humility, purity, and studying the mind. In this respect, I understood that it was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e motto of the Joseon Dynasty. The last paragraph 23 is the conclusion. This emphasizes being humble and patient in everything. In this motto, Buddhist elements were mentioned strongly, even more than Confucian elements. Also, among the materials of Yi Seung-hyu, the date of meeting at Chungju-mok is different between the collection of literature and the epitaph of Wonbu(元傅) (1220-1287). In this paper, through the external and content criticism of the historical material, it is concluded that 1241 is the year. The 13th century, when Yi Seung-hyu lived, was a period of great transformation and the greatest crisis in Goryeo society. The confrontational relationship between Goryeo and Yuan was established by the three vistings of King Wonjong of Goryeo, and the people of Goryeo lived under the dual-state system of Yuan and Goryeo. It was argued that the reality of history can only be grasped by looking at the history of this era, which is called the “Yuan Intervention Period,” from both positive and negative aspects. People’s lives in this era were more stable. Goryeo society is known as a pluralistic society where Confucianism, Buddhism, Taoism, and folk beliefs are freely practiced. However, it was argued that it is impossible to properly understand the society, culture, and customs of Goryeo society without properly recognizing Buddhism in this era. To this end, I argued that the historical reality of Goryeo can be properly grasped only through criticism of historical documents written in an atmosphere that rejects Buddhism. In 1273, Yi Seung-hyu was dispatched as a member of the envoys to attend and celebrate the ceremony in 1273 by Emperor Sejo of the Yuan to honor the empress and the crown prince. It is reported in his literary collection that Yi Seung-hyu edited the poems he wrote during his meandering life as ‘Bin-wang-rok’(賓王錄). When Yi Seung-hyu composed an excellent poem and displayed excellent writing skills, the Yuan leadership was impressed, so the diplomatic success of the Goryeo envoys was achieved in meeting Sejo of Yuan three times. ‘Bin-wangrok’ tells us that the ceremony to celebrate the ordination of the Yuan Dynasty, the Crown Empress and the Crown Prince, was a custom of the Goryeo Dynasty. At this time, Yi Seung-hyu had a relationship with King Chungryeol, the Cro

Ⅰ. 들어가는 말

Ⅱ. 이승휴의 생애와 시대 배경

Ⅲ. 촌거자계문의 분석

Ⅳ.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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